제52집: 강하고 담대하게 통일전선을 수호하자 1971년 12월 01일, 한국 남산성지 Page #28 Search Speeches

자신이 어떤 사명을 짊어지고 있"가를 자각해야

하나님은 후방에서 같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반드시 전방에서 개척되는 것이요, 전방에서 새로운 역사의 발전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방이라는 곳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아벨을 중심한 섭리의 때에도, 아벨 자신은 자기가 하나님의 섭리 앞에 하나되어 최일선에 섰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120년 간 방주를 짓는 꾸준한 생활권내에 섰지만, 자기가 세계를 대표해 가지고 최일선에 섰다는 것을 자각하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요,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한 지역적인 환경에서 벌어지는 것으로서, 자기가 대하는 매일 매일의 생활적 감정과 더불어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 그것이 역사적 전반에 긍(亘)하여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세면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 운명을 대신함과 더불어, 전체 복귀섭리의 운세를 좌우할 수 있는 세계사적인 대표의 자리에 섰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개인 개인을 대하는 환경, 처해 있는 생활환경에서 부딪치는 모든 외로움이라든가 어려움이라든가, 혹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여러 가지 슬픔이라든가 기쁨이 그 한 날 한 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지, 그것이 역사적인 생애 혹은 미래적인 소원과 더불어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세 자신도 그 당시에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모든 생활은 사람 한 개인에게만 한한 생활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활은 역사적인 생활을 대표했던 것이요, 섭리의 뜻을 대신해서 섰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바라보고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사자는 하나님이 그러한 관점에서 자기를 보시고 자기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것을 늘 생각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역사시대의 4천년 인류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섭리 앞에 대제사장의 책임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 섰다는 것을, 세례 요한 자신이 30여년의 생애를 통해 갖은 어려움의 생활을 해 나가면서 수도의 생활을 해 나왔지만 그 깊은 심정 가운데 자신이 그러한 자리에 섰다는 것을 자각하고 살 수 있는 자리에 서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요단강 가에서 예수 앞에 세례를 베풀어 주고 난 후에 그 사건을 그 한 날 특별한 사건으로 느꼈을는지 모르지만 역사가 뒤넘이칠 수 있는 중차대한 시점이었다는 것을 세례 요한 자신이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예수와 더불어 하나되지 못하고 분립되어 예수와 함께 죽음의 길, 혹은 뜻의 길을 가지 못한 사실은 그러한 인연, 그러한 감정, 그러한 생활터전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자기가 역사를 대표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전체의 역사를 대표해서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천년의 인류역사 가운데서 비로소 인간을 대표해 가지고 예수 한 분만은 자기가 역사적 섭리시대에 세계사적인 책임을 전체 앞에 지고 있다는 사실, 또 하나님을 대표해서 섰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 누구보다도 전체를 책임진 입장을 알았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자각된 새로운 시대의 중심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발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기원이 될 수 있었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오늘 우리 통일교회의 내 자신은 어떠한 자리에서 있느냐 하는 것이 언제나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시대를 대표한 자각된 자리에서 자기가 어떠한 위치에 섰다는 것을 확정지어 가지고 그것을 결정적 운명으로서 다짐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을 짊어졌느냐, 안 짊어졌느냐 하는 것을 먼저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자각과 더불어 실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데는 자기 개인의 생활권내, 자기 개인적인 감정권내에 긍(亘)하여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감정, 세계적인 새로운 역사적 감정과 더불어서 관계맺도록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인을 대표한 개인적 감정을 개개인이라든가, 가정이라든가, 종족이라든가, 민족이라든가, 국가에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심정의 터전 위에 하늘의 역사적 섭리를 어떻게 일원화시키고, 섭리상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소원하던 심정의 결과를 오늘날 생활권내에 어떻게 제시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약 자각하지 못하고 그와 같은 책임을 수행하지 못하는 자리에 섰다면, 통일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은 역사와 상관없는 분립된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 감각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감각을 대표하고 앞으로 미래의 감각을 대표할 수 있는 자리에서 언제나 주체적인 사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차대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우리의 입장인 것을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교인들에게 어떠한 폐단이 있느냐 하면 그러한 자각이 희박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각이 희박하게 될 때, 하늘의 섭리는 반드시 크나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시대의 우리 선조들의 과거를 통해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을 볼 때, 말하기는 쉽지만 이 말을 책임지고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실천을 해야 되겠다, 책임을 져야 되겠다' 하는 자리는 자기 홀로의 자리가 아닙니다.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하는 그 자리는 비록 자기 혼자 일지라도 역사와 더불어 결의하는 자리요, 시대와 더불어 결의하는 자리요, 하늘과 더불어 결의하는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하늘은 반드시 같이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