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집: 뜻을 대하는 우리들 1972년 08월 1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20 Search Speeches

심정을 통할 수 있" 뜻이 통일교회가 "라" 뜻

그러한 어떠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우리 인간들끼리도 행복하도록 해주고 싶은 사상을 가진 주체자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떠한 자리에 행복하게 해주고 싶을 것이냐? 절대적인 선의 주체로 계시는, 우리 인간 외에 또 다른, 악을 대비해 가지고 선의 주권, 혹은 선의 세계를 바라는 분이 있다 할진대는, 그분은 우리 인간 앞에 어떠한 자리에 선한 세계를 이루어 나올 것이냐? 우리 인간 앞에 어떠한 행복의 선을 소개해 나올 것이냐?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분이 선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말은, 행동은, 생활은, 혹은 제도는 어떤 것이냐?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확실하고도 틀림없는 내용을 가졌기 때문에 그래도 수천 년, 수만 년의 인류역사를 통해 악을 대비해 싸워 나오신 주체가 아니냐. 안 그래요? 하루 살림살이하다가 치워 버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기 때문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결정적이요 확정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나왔을 것이 아니냐. 확정적인 선의 주체자로서 개인을 중심삼은 생활관은 어떻게 될 것이고, 가정, 민족, 국가, 세계관이 어떻게 될 것이냐?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생활이 어려우니,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선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문제 외의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가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던 때 금이 필요했어요? 자기가 지은 피조물의 가치, 제2차적인 가치를 절대시하는 생활 재료로서의 돈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혹은 하나님에게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내가 없으면 안 되고, 네가 없어도 안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사랑. 새로운 사랑을 중심삼은 가치관의 확립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선악의 분기점에서 선의 경계선을 극복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악의 한계점을 타파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정서적인 문제입니다.

종교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 무엇이냐? 돈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간 자체를 최대 한계점의 가치로 추구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종교에 들어오게 되면, 그 인간은 그날서부터 폭락입니다. 주가가 폭락되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부정의 요인으로 제시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수천 년 동안 인류들이 고심한 최대의 문제의 해결 방안은 어디서 시작될 것이냐? 인간끼리는 안 됩니다. 인본주의 사상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원칙이 틀린 것입니다. 새로운 신본주의를 발견해야 합니다. 새로운 사고의 신본주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의 역사에 물들은 신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색다른 차원에서의 신에 대한 인정입니다. 그 인식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하나님을 존중시하는 종교관은 탈피해야 됩니다. 시대적인 신앙의 중심으로 서 있는 신은 부정해야 됩니다. 신이 없다고 부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적인 여건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관(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 관(觀)이 맞았더라면, 오늘날의 종교가 이렇게 낙후된 현실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심정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슬픈 사람을 보게 되면 슬픔이 감돌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엉클어진 사연에 동참하게 될 때 그와 나는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절대적인 선의 주체되시는 어떠한 분이 있다면, 그분의 사정을 들어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정 말고, 인간 심정 말고 그분의 사정이 어떻더냐 들어 보자, 그분의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심정은 어떻더냐, 그 심정을 파헤쳐 보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서 있는 자리는 차원 높은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 내연을 계승한 자리, 시대적인 환경의 여건을 수습한 자리가 아니라 이것을 초월한 경지입니다. 자기 자체만의 입장이 아닙니다. 또 다른 주체를 흠모하는 자리의 심정을 추구해 나오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뜻, 이 뜻이 바로 통일교회가 바라는 뜻입니다. 그 뜻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사연은 다른 것입니다. 달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엇갈리는 역사적인 길을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