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집: 아버지와 나 1959년 07월 1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7 Search Speeches

진정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인류의 보금자리는 사정이 통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심정이 통하는 세계입니다. 국경도 초월하여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이 `오냐 그렇구나' 할 수 있는 심정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그러한 심정세계의 느낌을 가지고 역사적인 사정을 초월하지 못한다 할진대 하나님의 통일이념은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헛수고가 됩니다, 헛수고. 신부니 아버지니 하는 것도 전부 다 공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이 사무치게 될 때는 민족이 문제가 아니요, 지상의 어떤 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것을 넘고 넘고 또 넘고,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도 기뻐할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역사의 종말에는 그것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무한한 천국이 내 마음에 있다는 것, 그것은 천국이 내심정에서부터 연락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심정의 연결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우리가 자식이라 할진대는 그 몸과 내 몸은 한 몸입니다. 아버지의 피살과 내 피살은 일체예요, 일체.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부모가 왜 자식을 사랑합니까. 자기 몸의 연장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라 하려면 핏줄이 같아야 됩니다. 핏줄이 연결되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심정면에서 하나님과 예수와는 일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동맥이 움직일 때 예수의 동맥도 움직이고, 하나님의 맥박이 뛸 때 예수의 맥박도 뛰고, 정할때 정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대해서 제가 부모를 사랑하고 사모합니다.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피가 통해서 자동적으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어떠한 논리적인 조건을 해탈한 세계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양자라고 했습니다, 양자. 여러분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타락한 인간은 양자라고 하였습니다, 양자. 양자는 혈통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양자의 혈통을 청산하고 아버지의 심정으로부터 연유된 혈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서 그 심정을 이어받은 아들, 사랑하고 싶지 않아도 자연히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아들을 고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나를 사랑할 수 있고, 사모한다고 말하지 않고도 아버지를 사모할 수 있고, 내가 아버지를 위해 싸운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심정이 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심정이 동하지 않는 것이 타락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면에서 달랐습니다. `아버지!' 하면 슬픔에 잠긴 아버지도 `오냐' 하셨던 거예요. `아버지!' 하는 그 한마디에 아버지께서는 수억천만인의 기도의 세계를 넘어선 심정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오냐' 하는 이것은 슬픈 역사를 초월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중심삼은 자연적인 인연입니다. 그 무엇이 어떻게 할래야 어떻게 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고, 어떤 조건으로도 이것을 막아낼래야 막아낼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 봤습니까?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세포까지 동하게 됩니다. 저 젊은 사람이 정신없는 소리한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누가 무어라 해도 좋습니다. 사랑의 심정, 사랑의 감촉은 온 실존세계의 본질이고 전체를 종합한 맛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여러분이 들어가서 기도한다 할진대 밤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밥을 먹었는지 잠을 잤는지 그런 인식을 초월하게 됩니다. 인간이 육신을 쓰고 인식하는 것보다 몇 천만배 능가하는 내적인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예수님이 핍박받다가 피곤한 다리를 끌고 감람산에 들어가 하늘 대해 고요히 기도하시던 그 시간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그 순간은 자기 일신의 전부가 심정세계에 동화되어 들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잊어버릴 수 있는 심정적인 내용을 갖추었기에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에 화하여, 그런 심정에 동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들이라고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이 세계에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내용을 가지고 오셨으나 심정세계의 생활내용을 해명해 주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그 사정은 소개하였지만 심정의 내용을 소개하지 못하였기에 다시 와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심정의 귀일점을 찾아 들어가려면 내 몸이 아버지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내 피가 아버지의 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서게 될 때 여러분은 성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전이 되면 그 마음 몸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원이 자기가 아닙니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아버지에게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체는 여러분 것이 아니라 아버지 것입니다.

여러분의 피살이 아버지의 피살을 대신한 심정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하늘이 슬퍼하실 때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여기 처음 온 사람들, 그런 자리가 어디 있겠느냐 하겠지만 있단 말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모든 실존의 가치를 몇 천만배 능가한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될 때는 인식을 초월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