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집: 산을 찾아가시는 예수의 슬픈 심정 1959년 01월 2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95 Search Speeches

산을 찾은 선조"의 충절을 회상하며 각오하신 예수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 시대로 와서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를 한 이후 이삭 번제의 명령을 받고 산상을 향하던 것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에 사라의 만득자(晩得子)인 이삭을 속여서 모리아산상으로 데리고 가던 아브라함의 비장한 심정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누구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고. 아브라함은 누구를 위하여 독자인 이삭을 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물론 아버지를 위함이요, 동시에 오실 메시아를 위함이었다는 것,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모세를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바로 궁중 40년과 미디안 광야 40년의 수고의 노정을 거쳤습니다. 이렇게 서글픈 심정을 품고 나오던 모세 앞에 호렙산 기슭의 불붙은 가시덤불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새로운 약속을 하시던 그 장면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또 모세가 자기가 찾아오신 하나님을 호렙산에서 만나 불변의 인연을 맺는 장면, 원수인 사탄을 이 우주에서 기필코 제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에 대하는 모세의 충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모세가 인연 맺는 그 장면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택한 이스라엘백성을 애급 땅에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세는 80노객이요 광야에서 시달린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과 모습이야말로 하늘의 심정에 사무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표준을 갖고 있던 모세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60만 대중을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황무지인 광야로 끌고나온 입장에서,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야 할 책임을 짊어진 모세는 그들이 잘못되거나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까 염려해서 찾아 올라간 곳이 시내산이었습니다. 시내산정에서 모세는 40주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내려오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러한 모세의 사정을 연상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이렇듯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것은 오로지 하늘 아버지를 위함이요, 메시아가 오실 길을 닦기 위함이었고, 더 나아가서 선민을 세우시어서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복귀된 나라를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사탄편인 바알의 제사장들과 대결하던 그러한 장면은 모두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러한 회상을 하며 걷던 예수께서는 선조들이 산정에 올라가서 판가리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점을 찾기 위하여 하늘 앞에 기도했던 그 사실이 모두가 하나님을 위함이요, 나아가는 자기를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회상하며 비장한 심정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예수의 심중의 세계를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노정에서 사탄에게 이끌려가던 그 발걸음은 자기를 위한 생각을 하며 걷던 걸음이 아니였습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통하여 알다시피, 예수님은 개인 복귀와 환경 복귀와 세계 복귀를 해야 할 것을 그 심중에 품고 이러한 상징적인 조건의 과정을 거쳐서 산정(山頂)에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일대 시험이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역사적인 새로운 선조로서 전통을 세우고 하늘의 심정을 상속받겠다는 마음을 품고, 사탄을 따라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셨던 예수님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뜻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장한 심정을 품고 나선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선조보다도 확고한 각오를 하고서 사탄을 그 장중에 쥐고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광야에 나가셨던 분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산정에 홀로 섰던 예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역사노정을 회상할 때 자기 일신이 비장한 각오를 해야함을 느낀 동시에, 그 당시 택한 이스라엘민족을 생각하게 될 때에도 역사적인 책임감을 느끼며 말할 수 없는 슬픔의 심정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세례 요한을 세워서 하늘의 뜻을 성취할 수있는 새로운 길을 닦게 하였습니다.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터를 닦게 하기 위해 미리 세례 요한을 보냈는데, 그 세례 요한이 예수를 불신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이스라엘민족을 선민으로 축복하시고 4천년 동안 끌고 나온 그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적인 책임을 담당하고 나타날 수 있는 백성과 택한 자가 간 곳 없어졌습니다. 그런 연고로 잃어버린 무리를 다시 찾아야 했던 예수님의 그 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된 예수님은 낙망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모든 택한 백성과 세워진 무리를 생각하게 될 때는 슬픔에 북받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자리를 만든 동기와 기원을 더듬어 살피고, 또한 그 당시까지의 역사적인 심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 이런 곡절을 있게 한 존재가 바로 사탄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기필코 사탄에게 승리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갖고 사탄의 시험을 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장한 장면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