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집: 효과적인 전도 방향 1994년 11월 21일, 한국 설악회관 Page #188 Search Speeches

전도를 상대를 '이고 자기" 무한히 희생을 해야 하" 것

하나님이 창조하기 시작할 때 먼저 투입했어요. 이것이 투입과 주입, 투입했다구요. 투입을 하는데는 그냥 투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표준으로 해 가지고 사랑의 대상을 만들기 위해서 투입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그렇잖아요? 여러분들도 사랑의 대상은 자기보다도 훌륭하기를 바라잖아요. 이것은 뭐 한계가 없다구요. 무한한 참 존재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할 때 그 표준이 하나님 이상 될 수 있는 상대이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양심이라는 것은 무한한 욕망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어서 하나님을 점령했더라도 그 이상이 또 있게 되면 그것을 점령하려고 합니다. 무한한 단계까지 점령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의 상대가 없기 때문에 사랑의 상대를 지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랑의 상대를 맞아 가지고 그 사랑을 체휼한 이후에, 그 사랑을 중심삼고 완성한 이후에는 그 상대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창조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것이 지금 우리의 한계예요. 지금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한계선에서의 그 요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일체가 돼 가지고 하나님의 기쁨의 상대가 되어 하나님 앞에 요구한다면 무엇이든지 창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류 시조를 창조할 때는 어떠한 요구도 없이 하나님 스스로 창조했지만 사랑의 상대가 상대로서 완성되어 하나님이 기쁨을 느끼는 일체적 입장에 서게 되면 그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창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한 입장에 선 하나님은 상대를 지을 때 무한히 투입하고 투입하고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투입하는데도 그냥 투입하지 않고 그 상대를 위하고, 상대를 높이고, 상대를 섬기고 받드는 자리에서 이런 창조를 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주장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전부 높이고 자기는 무한히 희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대를 높인다는 것은 '봉사' 라는 말로 통합니다. 받들고, 시중 들어야 된다 이거예요. 자기 자신의 위신을 잊어버리고 무한히 받듦으로 말미암아 무한한 상대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무한히 투입하는 것입니다. 무한히 투입하고 잊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높고 높은 상대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출발이에요.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자기 이상 높은 존재를 사랑의 대상으로 추구하는 것이 창조의 원칙입니다.

그러면 투입한 그 자체가 상대에게 이루어질 때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구요. 반드시 상대는…. 상대는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되느냐 하면, 그 상대는 아무 관념이나 무슨 생각이 없다구요. 존재의 의식이라는 게 없는 거라구요. 생겨나 가지고야 존재의 의식이 시작하는 입장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창조될 수 있는 편은 어떤 편이냐 하면 말이에요. 하나님이 주입했으면 그만큼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된다는 거예요. 눈물이 날 수 있는 감동이 벌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인간 세계에서 다시 주입을 해서 돌려보내야 된다구요. 이것을 원칙으로 보면, 운동이라는 것은 전부 다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해서 운동이 벌어지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투입과 주입, 이것이 연결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는 주체와 대상 관계에 있다 이거예요. 하나님이 주체라면 우리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