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집: 섭리로 본 역사적 완성기준 1971년 08월 17일, 한국 청평수련소 Page #323 Search Speeches

재림주가 오시" 목적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은 예수님보다 못한 패들입니까, 나은 패들입니까?「나은 패들입니다」 예수보다 못해 가지고 예수가 실패한 섭리의 뜻을 이룰 수 있어요, 없어요?「없습니다」 똑똑히 대답해 봐요. 그럴 수 있어요, 없어요?「없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예수보다 낫다는 전통이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동면이나 신앙면에 있어서, 혹은 목적을 정해 놓고 나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렇게 시시한 기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기도는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죽게 되었는데 교회가 무엇이고 뜻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시시한 거라구. 여러분, 그런 사람이 뜻에 합당한 사람이예요?「아닙니다」

내 자식이 죽게 되었고 내 여편네가 죽게 되었고, 내가 죽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죽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죽게 되는데 '나는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뜻을 아는 사람이예요. 아니면 내 자식과 아내가 죽더라도, 내가 죽어 넘어진다 하더라도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위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뜻을 아는 사람이예요? 어느 쪽이 뜻을 아는 사람이예요?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만약 '하나님이 약속을 했으면 뜻을 이루어 주셔야지 약속을 해 놓고 북한 땅에는 왜 가게 해, 하나님도 돌았지' 그렇게 한다면 뜻이 이루어지겠어요? 선생님은 세계적 원수 앞에 이마를 맞대고 가슴을 헤치고 '자, 죽여라'고 하면서 나왔습니다. 벌거숭이가 되어 혼자서 원수에게 대드는 거예요. 이런 선생님이 미욱한 사람이예요, 지혜로운 사람이예요? 얼마나 미욱한 사람이예요. 옥살박살이 나서 건데기도 못 건질 만큼 미욱하다구요.

종족복귀의 기틀을 마련해야 할 역사적 운명시대에 있어서 지금까지 6천년 동안은 탕감복귀역사입니다. 이것이 역사를 창출해 나왔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역사라고요. 완성시대에 있어서 실패한 역사를 남긴다면 하나님께 서러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조건이 남아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운명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역사의 운명을 밑에서부터 잘라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개인이 나타나 그 개인이 완성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아담보다도 낫고 예수보다도 나은,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고 이 세계 사람들이 굴복할 수 있는, 그리고 심판할 수 있는 승리적인 역사의 완성기준을 세울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남성으로 이땅 위에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러면 재림주가 오는 목적이 어디 있느냐? 완성적 기준이 되기 위해서는 사탄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사탄에게 참소받아 가지고는 안 되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재림주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땅에 와서 마음대로 신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반대해 보라는 거예요. 주님이 이 땅에 와서 해야 될 일이 역사적인 재탕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담 가정을 반대하던 사탄의 세력과 부딪쳐야 하고, 가인 아벨을 중심삼고 민족을 대해 승리의 조건을 세우기 위해 가인권을 거쳐가야 합니다. 또한 노아 가정 시대에 거쳐가고 아브라함 가정 시대에 거쳐가고 모세 가정 시대에 거쳐가고 사가랴 가정 시대에 거쳐가고 예수 가정 시대에 거쳐가고 기독교 사도들이 거쳐간 과정까지 전부 거쳐가야 합니다. 그래야 탕감이 되는 것입니다.

종적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하는 것입니다. 일대를 중심삼고 횡적으로 탕감함으로써 6천년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나간 탕감의 역사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 복귀원리입니다.

복귀하는 데 있어서, 아담 가정이면 아담 가정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아담보다도 더 슬픈 골짜기를 지나가야 합니다. 그 슬픈 골짜기의 끝을 돌아오지 않고는 복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겪은 슬픔에 뒤미치는 슬픔을 겪어 가지고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거예요. 알겠지요? 노아의 슬픔보다 진하지 않은 슬픔을 거치면 돌아올 수 있겠어요? 그렇게 되면 사탄권내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탄에게 잡아 먹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통 기준, 그 끝 이상을 가지 않으면 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 이상의 결의와 각오를 하고 고생길을 달갑게 가지 않고는 못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가졌던 이상의 각오와 신념을 갖지 않고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예수가 싸울 때 가졌던 지혜와 신념 이상의 지혜와 신념을 갖지 않고는 못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그렇습니다」 이것이 복귀의 원칙입니다. 똑똑히 알아야 되는 거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