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집: 내일의 주인 1971년 06월 06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43 Search Speeches

비참한 자리-서 승리가 결정된다

통일교회는 지금 누구도 모르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구도 모르는 현재의 입장을 중심삼고 세계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선구자적인 사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 이런 움직임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의 세계가 어디서부터 형성될 것인가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좋은 철학사상이라 해도, 그 철학사상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조직을 이루어 실천하는 운동으로 승화 되지 않으면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자기 일개국을 중심삼고 움직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개국을 희생하더라도 세계의 행복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지금까지 희생해 나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두고 보면 순교의 역사입니다. 그 순교를 시시한 꼬라비 신도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머리가 되는 신도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기독교는 세계를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건 자동적으로 되게 되어 있지요. 그러지 않았으면 하나로 남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통일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의 입장이니 대한민국에서 제일 수난길을 가야 되고 세계에 있어서도 수난의 첨단을 가서, 그 수난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기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영광이 통일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것으로 옮겨지게 하기 위해, 현실적인 기반을 상실하는 자리, 아무리 비참한 자리라 해도 그 자리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주인의 자리를 상속받을 수 있는 터전이 되면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런 것을 두고 볼 때에 내일의 주인은 현실적 기반 무대에서, 공적인 입장에서, 수난을 받는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난을 받는 동기는 무엇이냐?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 대가와 결과를 현실에서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에 남겨 주기 위해서, 현재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그러한 현재의 환경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미래의 주인이 설정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앞으로 교회에서 움직이는 일에 보다 충실하길 바랍니다.

여러분 보세요. 1970년대에는 1960년대보다 더 비참한 명령을 해야 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을 거예요. 지금까지는 가정을 가진 부인들만 동원시켰습니다만 조금 넘어가면 주부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들딸까지도 동원해야 됩니다. 아들딸이라고 그냥 갈 수 없습니다. 아들딸이 앞장서야 됩니다. 아들딸이 열 살밖에 안 됐으면 '지금 열 살이지만 1970년대 말쯤 되면 스무 살이 되니 활동할 수 있다. 어서 먹고 빨리 자라거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정 사위기대를 동원해 가지고 만민을 위해 괴나리봇짐을 지고 피난민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서 적에게 쫓겨 한 곳으로 몰려 가는 피난민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한 은혜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세계로 떠나는 피난민 형태가 벌어지는 날에는, 세계가 우리 앞에 점령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므로 통일교회에서 가정적 사위기대, 즉 아들딸 며느리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끝장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하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야 사위기대 복귀를 위한 탕감이 완결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원리적 견해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 가만히 보면, 교회가 어려우니까 '선생님이야 책임을 완성한 세계적인 분이니 선생님의 어려움은 난 모르겠소. 우리 교회가 어려우니 도와 주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당당해요. 좋지 않은 풍조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효자라면 도와주겠다고 해도 꽁무니를 빼며 싫다고 할 텐데, 떡은 줄지 말지 한데 김칫국부터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동기가 되어야지 자기들이 동기가 되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어떤 지역장이 도와 달라고 찾아왔는데 남자가 참 딱하지요. 아이쿠 큰일났다고, 이제는 망했다고 왔어요. '그래서 망해라 이 녀석아!' 하고 보냈습니다. 누가 동기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주는 데도 원칙이 있는 거예요. 선생님이 피동적인 입장에서 달라면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피동적인 입장에서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 대신 주동적인 입장에서 심각하게 하는 사람이예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한때 해먹고 보따리를 짊어지고 후퇴하는, 임기응변해 가지고 한몫 보겠다는 사나이가 아니예요. 심각하다는 거예요. 선생님 이상 심각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심각해 봤습니까? 자기 자식의 배를 째고 자기 아내의 배를 째서 제사지낼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까지도 하늘 앞에 제사 드릴 수 있는 각오를 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천태만상으로 그냥 남겨 놓고, 하지 못할 것을 하나님 앞에 간구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선생님도 개인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놓고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공장 문제를 중심삼고 지금까지 한 5년 동안 정성들였는데, 그 정성들인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창조주 하나님 앞에 정성들인 것입니다. 내가 정성을 들이면 어떠한 기업주 이상의 철석같은 정성을 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는 확고한 결론 밑에서 지금까지 정성들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금년에 와 가지고 다 맞아떨어졌습니다. 과정에서는 별의별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뭐가 어떻고 어떻다는 말도 많았어요.

여러분, '행차 뒤에 나발'이란 말이 있지요? 통일교회 무리는 행차하는 가운데에 나발을 불어야 할 텐데, 이미 행차한 후에 '아이쿠, 잘못했습니다' 하고 나발을 분다는 것입니다. (웃음)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선생님이 소수의 통일교회 무리를 이끌고 사방으로 망하는 운세권, 망하는 세계권내에 에워싸여 있었는데도 망하지 않고 이만큼 뚫고 나왔습니다. 사실은 여러분 개인의 간단한 생활과는 다릅니다. 언제나 심각합니다. 선생님은 원리적 조건에 걸릴 것 같으면 죽어도 안 합니다. 절대 안 한다구요. 천하가 다 반대해도 밀고 나갈 수 있는 안팎의 사정을 딱 감아 쥐고 밀고 나갑니다.

재미있는 것은 통일교회의 간부들 가운데는 멍텅구리가 많은데 외부에 있는 영통하는 사람들은 통일교회 간부들의 자리를 노리고 자꾸 선생님한테 접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름까지 대면서 '지금 누구누구가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고 합니다. 세밀하다는 거예요. 앞으로는 그럴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도 문지기를 알지요? 앞으로는 총 들고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 문지기는 필요없습니다. 눈 감고, 보지도 않고 다 아는 문지기가 생겨날 거예요.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녀석, 네 조상은 어떻고 어떻지' 하며 배경까지 꿰뚫어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남아져야 할 곳은 과거의 승리의 요인을 빛낼 수 있고 미래의 승리적 여건을 제시할 수 있으며 현실에 있어서 승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리인 것입니다. 이 자리는 여러분이 망상하고 바라는 가상적인 자리가 아닙니다. 피가 흐르고 죽음이 뒤넘이치는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이 자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그런 현실의 있어서 건설자가 되어, 그런 현실에서 자기 스스로 정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축수를 드릴 수 있는, 거기에서부터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미래에 그런 역사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 통일교회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