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집: 발걸음을 멈추고 지키시는 자를 다시 바라보자 1959년 03월 0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52 Search Speeches

인간 최고의 복된 자리와 안식처

그래서 중간적인 나를 찾아야 할 우리인데, 종교가 오늘날까지 시대 시대를 거쳐오면서 많이 공헌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의 세계는 발전이 없습니다. 발전이 없어요. 왜? 심정의 세계를 대신한 연고로 발전이 없습니다. 몇 천년전이나 몇 억만년 후나 발전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는 심정, 자기 동족과 자기 친척을 사랑하는 심정, 이러한 심정은 발전이 없습니다. 그 심정 하나 붙들고 전체를 대신할 수 있고, 그 심정 하나를 가지고 완전성을 대신할 수있고, 그 심정 하나가 전체 행복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생 최고의 행복지는 어디며, 최고의 안식처는 어디인고? 하나님이 어떠한 주체로 계시다면 우리가 그의 아들이라 주장할 수 있고, 그를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곳, 또 그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곳입니다. 정적인 기반 위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지상에 벌어진다 할진대는 그 순간부터 인간세계는 행복한 세계요, 인류가 바라던 최대의 성공의 세계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이념을 갖고 나온 사람이라도 다 선을 지향하여 선에 대한 감정을 충족시키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 위에 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였고 나는 하나님과 일체라고 하였습니다. 역사노정에 이 이상 위대한 사실을 선포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대하여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 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이라고도 하였고, 제자라고도 하였습니다.

인간의 전체적인 생활감정을 움직여 모든 요소를 자극시킬 수 있는 전체 요소를 들어 그의 주체적인 가치를 대신 주장하셨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종교의 교주도 예수와 같은 주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온 만상을 바라볼 때 정적인 심정으로 바라보셨고, 역사적인 인물들을 대할 때에도 평면적으로 대하지 않고 역사적인 심정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모순된 현상은 타락된 세계였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습관적인 인연을 맺고 정적인 관계를 가진 세게 앞에 일대 폭탄선언이었고 혁명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건 왜? 예수님은 자신이 느끼고 자신의 마음 속에 흐르는 사랑의 심정으로 인간들을 바라볼 때, 하늘 땅을 통하고 인류의 모든 심정을 통하고 시작과 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견지에서 바라볼 때, 그때까지 인간들이 서로 사랑한것은 하늘로부터 본연의 사랑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주장하고 나선 예수님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원수였습니다. 전부가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신 걸음은 슬픈 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슬픈 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갈보리 산상에서, 원수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실 때의 그의 슬픔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또 그가 소망과 희망을 품고 바라보았던 기쁨의 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에도 무한대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슬픔이 무한대의 슬픔일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한계권내의 소망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을 탄식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의 슬픔은, 감성을 가진 우리 인간이 몇천만년 생각해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슬픔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반면 하나님의 심정이 무한한 슬픔으로 얼룩지기 전에는 인간을 소망하고 그리는 무한한 기쁨의 심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한한 슬픔에 사로잡혀 파멸할 것이 아니라 슬픔을 박차고 무한한 기쁨을 찾아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 심정을 붙들고 싸워나갈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생활을 요셉가정에서 추방을 당하여도 그 슬픔보다 더 슬픔이 있는 것을 아셨고, 국가로부터 몰림을 당하고 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몰림을 받아도 그 슬픔 이상의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몰림을 당하고 배척을 받아도 그 슬픔 이상의 슬픔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자리에 들어가서도 내가 죽는 자리에서 느끼는 슬픔 이상의 슬픔이 있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었기에, 원수에 대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는 자신의 심정보다도 더 큰 슬픔의 심정이, 더 큰 슬픔의 역사가, 더 큰 슬픔의 기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