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집: 기독교 재교육 운동과 가정 복귀시대 1994년 03월 05일, 미국 이스트가든 Page #54 Search Speeches

하나되어 있으면 자극을 못 느껴

왜 그렇게 상대가 필요하냐? 부모님 생일날 내가 얘기했지요? 왜 상대가 필요하다구요? 왜? 충동, 자극적인 충동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해요. 여러분이 마음이 있지만 마음을 못 느낀다구요. 사랑도 혼자 있을 때는 못 느껴요. 다 사랑은 갖고 있지요? 사랑을 갖고 있지만 혼자 있으면 못 느낍니다. 상대가 나타나면 느낀다구요.

왜 그러냐? 혼자 있을 때는 왜 못 느껴야 되느냐 이거예요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못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돼 있기 때문에 못 느낀다 이거예요. 제로가 된다는 거예요. 수평선, 수평선 이게 전부 다 중심한 때문에 중간에 떠 있지만 말이에요. 그걸 못 느껴요, 이게. 수평이 되면 딱 그와 같이 된다 이거예요.

이거 이렇게 되어서 못 느끼는 거예요. 하나되게 되면 못 느끼는 거예요. 하나되어서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이게 공중에 떠 있지만 못 느껴요,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왜 못 느껴야 되느냐 이거예요. 느끼면 안 돼요. 느끼면 뭐냐 하면 상대로 찾아오는 자극을 전부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상대가 100만한 것을 느끼려면 완전히 제로가 되어야지, 30만큼 있으면 70밖에 안 느끼게 되는 거라구요. 그것이 하나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있으면 거기는 몰라요. 안 느낀다 이거예요. 전부 다 수평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잔잔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거예요. 거기에 뭐가 하나 '핑' 떨어지면 '푸-' 하고 완전히 파문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되어 있게 되면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점 내가 가까이 가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상대를 대해서 느끼는 것이지 자기 자체를 대해서 느끼게 안 되어 있다 이거예요. 눈이 눈을 보기 위해서 있어요? 코가 코 냄새를 맡기 위한 거예요? 상대적이지요. 말도, 듣는 것도, 감각은 전부 다 상대적인 기준에서 자극을 느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기준에서 백 퍼센트 자극을 느껴야지 자기 자체에서 자극을 느끼게 되면 상대적 자극을 잡아먹는다구요. 이렇기 때문에 하나된 자리는 전부 다 자극을 느끼기 위해서 제로 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동이 치는 걸 느껴요? 못 느낍니다. 그거 왜 못 느끼느냐? 하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사랑도 내게 있는데 사랑을 왜 못 느껴요? 사랑도 못 느낀다구요. 여러분 생명이 있지요? 생명의 힘이 있다구요. 생명을 느끼지 못해요. 그게 하나돼 있기 때문에 제로 상태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양심이 있지만 양심을 못 느껴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내게 같이 있다구요. 나의 맨 밑창에 하나님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뭐냐 하면 사랑의 뿌리입니다. 생명의 뿌리입니다. 양심의 뿌리예요. 제일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중앙에 있기 때문에 안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을 찾으려면 불교에서는 무아경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하나된 깊은 양심 밑에, 그 자리에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딴 데 있는 게 아니예요. 양심, 나와 하나돼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있는데 말이에요,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있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뿌리 밑에, 사랑을 중심삼고 양심과 생명이 좌우에 있는 거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구요. 그 센터는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뿌리에 하나님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 사랑을 움직이지 않고는 하나님을 몰라요. 아무리 양심적이고 아무리 생명이 활동하더라도 하나님을 못 느낀다는 거예요. 그것이 센터가 되어 있다구요, 센터. 종적으로 센터가 되어 있어요. 생명과 양심이 이렇게 되어 있다면 사랑의 센터 밑에 하나님이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또 이 사랑의 끄트머리 제일 높은 데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