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집: 한 많은 아버지를 모실 이 1959년 05월 2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46 Search Speeches

예수님의 슬""과 하나님의 슬""

그러기에 하늘의 한을 풀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은 행복을 가지고 나타나지 못하셨고, 자유를 갖고 나타나지 못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최고로 선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죄인 중의 죄인과 같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 이상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온 천상이 환희할 수 있는 하늘의 왕자인데도 불구하고 지상에서는 밟힘의 왕자요, 핍박받는 왕자요, 사라져가는 왕자와 같이 사시던 예수의 슬픔 이상의 슬픔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위신과 자기의 처신, 그리고 사명받은 것을 다 이루지 못하고 역경에 부딪쳐 말없이 사라져 갔던 예수님 이상 슬픈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4천년 동안 하늘이 수고하여 선민으로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 앞에 배척받았습니다. 섭리의 뜻을 받들게 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사랑해 나오던 유대교단 앞에 핍박받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종족에게 몰림을 받았고, 사랑하는 제자 앞에 몰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때 만일 예수가 인간적인 한을 가졌다면 이들에게 저주밖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을 위하여 왔으나 교단이 배반하였고, 종족과 친척 혹은 택한 자들을 위하여 왔으나 그들에게서 마저 배반당한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가 원한을 품고 그들을 대해 저주를 하려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저주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는 도리어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당했던 그들의 슬픔의 한을 붙들고 자신을 잊고 염려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천국 건설의 왕자인 줄 알았더니 아니예요. 그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제거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선을 바라고 뜻을 바라 나온 역사노정의 애절한 심정, 사무친 원한의 심정을 체휼하고 나선, 역사를 대표한 슬픔의 왕자였습니다. 흑암의 세계에서, 사탄 주관 하에서 신음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짐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내적으로는 슬픔의 심정을 책임지고 외적으로는 고통의 짐을 책임져 이것을 사탄 앞에 해결지어야 할, 그리하여 하늘 앞에 승리의 발판을 세워야 할 슬픔과 고통의 왕자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위하여 그토록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예수의 슬픔 이상, 예수의 고통 이상, 예수가 느끼는 한스러움 이상 한에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고이 고이 성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허락된 자유의 동산에서, 허락된 이념의 세계에서 하늘과 더불어 평화스럽고 행복스럽게 살아야 할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을 잃어버리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그 한 사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한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동고동락해야 할 아담 해와가 하늘의 품을 떠나 사탄에게 유린당하고 사탄에게 옮겨가는 것을 바라보셔야 했던 하늘의 한스러운 심정, 그 한스러운 심정을 잊지 못하시는 하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4천년의 한스러운 인류 역사를 뒤바꾸기 위하여, 그 한탄스러운 역사를 청산하고 행복스런 복귀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으나 이렇게 오신 예수님을 모셔야 할 민족은 어디 갔던고? 받들어야 할 세례 요한은 어디 갔던고? 섭리를 대하여야 할 제자들은 어디 갔던고? 다 가버렸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을 택한 것은 예수님께 한스러운 고난의 길을 거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보냈다면 이스라엘민족을 4천년을 통해 선민으로 택해 세울 리가 만무하다는 거예요. 이 예수님을 모셔야 할 민족이요, 받들어야 할 교단이요, 섬겨야 할 세례 요한이었고, 예수님 앞에 충신이 되어야 할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다 버리고 가는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무엇을 느꼈을 것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