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집: 자녀의 날과 그 사명 1971년 11월 1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94 Search Speeches

기독교가 희생을 치러 나온 목적

그러면 기독교가 역사 가운데서 그런 희생을 치른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그 시대에 있어서 개인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목표하는 바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최후의 한날에 사탄세계를 굴복시키고, 하늘을 원수시하고 반대하는 무리를 완전히 제압하고 완전히 굴복시켜 가지고 그들의 입을 통해서 '그대들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충성과 효성을 다했다'고 증거할 수 있는 그때를 바라보고 헤치고 나오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증거하는 효자는 이 세계, 혹은 역사시대의 종말에 남아질 수 있는 효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부모가 자기에게 효도하는 아들을 들어 효자라고 말하는 부모가 많을 것입니다. 그의 친척들도 거들어 그를 효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으례 역사적으로 효성의 도리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인륜 도덕을 통해서 그 환경에 있는 백성이면 백성의 무리가 그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효자라고 긍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짜 효자는 어떠한 사람이냐? 그 사람과 원수가 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내가 효자를 추린 다면, 나하고 원수이긴 하지만 그 원수의 아들인 아무개 외에는 효자가 없다'고 증거를 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세상에 없는 최고의 효자가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오늘날 사탄세계에서 종교를 믿고 나오는, 기독교면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효자, 혹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한 충신을 누가 결정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그것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했더라도 그 사람은 완전한 효자나 충신이 못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칭찬하더라도...

여러분이 욥에 대해서 알겠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좋은 입장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에는 사탄이 참소한다는 거예요.하나님이 복을 줬으니 누구든지 하나님을 좋아하고 다 그럴 수 있다고 참소할 수 있다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사탄에게 맡겨 가지고 '너 어디 이 사람이 하늘앞에 효자인가 아닌가 한번 테스트해 봐라' 해서 사탄이 '예,알겠습니다.해보겠습니다`해 가지고 갖은 수욕을 당하게 하고 역경에 몰아넣고,이리 치고 저리 치고,이리 끌고 저리 끌고,올라가고 내려가고,앞뒤로 가고,좌우로 가고 아무리 죽을 고비에 몰아넣더라도 변함없는 정성을 다하게 될 때에는,사탄이 '나는 손댈 수 없다'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이여,당신이 말하던 거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틀림없는 효자요`하게 될 때에 그 사람은 세계적인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는 최후의 십자가의 길을 향해서 갈 때에 무엇을 붙들고 나갔느냐? 예수는 사탄 마귀까지도 부정할 수 없는 길을 가기로 다짐했기 때문에,하나님은 예수를 원수들 편에 세워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시키게 했던 것입니다.이런 내면적 사연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기독교를 믿고 나오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효성을 다하는 진정한 효자의 도리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 앞에 효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왔고, 하늘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대표자로서 충신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왔다가 생명을 바치고 갔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사상을 이어받은 기독교인이라면 그 범위를 좁힐 것이 아니라 넓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나라를 중심삼고 증거되는 것보다도 세계적으로 증거되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간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요, 하늘의 효자요, 하늘의 충신이다`고 증거할 수 있는 판도를 넓혀 왔습니다. 이것이 넓혀질 수 있는 싸움을 할 때, 기독교는 언제나 발전했습니다. 그런 투쟁이 벌어질 때는 하나님이 협조했지만, 안락한 자리에서 교권을 주장할 때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협조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날 하나님이 바라는 효자, 하나님이 바라는 충신이 어디에 있느냐? 인류역사 과정에 그런 분이 있었느냐? 이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 가지고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주장하면서 독생자로서의 효는 했을는지 모르지만, 하늘나라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의 충신의 책임은 다하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세우기 위한 싸움의 무대에 선 예수님은 한마디도. 한 가지의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또한 인류를 초월하여 세계를 하나님 앞에 바치기 위해서 세계를 대해 '하나님 앞에 세계는 이러해야 된다' 하고 만민을 대해 '너희들은 내가 가는 길을 본받아라' 하며 세계를 위해 사탄과 대결하여 그 사탄이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충신이라고 공증할 수 있는 무대에 서 봤느냐? 못 서 봤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무대에도 못서 봤고, 세계의 무대에도 못 서 봤습니다. 개인으로서 독생자로서 하나님 앞에 효자의 자리에는 서 봤지만, 나라를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하는 충신의 자리에 서 봤느냐 할 때 못서 봤다는 거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