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집: 일심통일 1970년 01월 1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72 Search Speeches

부모와 동반할 수 있" 자리

삼천만이 수난길에 있으면 그 수난의 삼천만 민족을 보고 부모가 자식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애절히 여기는 이상의 애절한 마음을 가지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진대, 삼천만의 이 민족은 그들로 말미암아 수습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30억의 인류를 중심삼고 그러한 마음으로 불철주야 노력하는 무리가 있다면 40년만 넘어가게 되면 세계는 그들 앞에 수습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철칙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생님이 관망한 결과가 틀림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을 무자비하게 내보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자비한 길을 통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생사의 경각(頃刻)을 초윌해서 가는 겁니다.

죽음과 연속시켜 가지고, 죽음의 피와 살을 여기에 퍼부어 가지고 그 목적의 세계로 나가려는 단 하나의 종교가 있어야 됩니다. 그 종교가 순교의 길을 걸어 나온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순교의 피와 살로 이어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논위할 때 어떠한 종교보다도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얼마나 이 민족을 자기 피나 살과 같이, 자기 몸과 같이 여기면서 이 민족을 위해 목을 놓아 통곡했나요? 아무리 불의한 자식이라도 그가 법망에 걸렸다든가, 혹은 그 나라 법의 제재를 받는 운명에 처해졌을 때 그 부모가 '잘됐다 이 자식아! 그래도 싸다'고 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나하고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자식아! 왜 내 말을 안 들었느냐' 하며 꾸짖기는 해도 자식에게 사랑이 흘러가는 것이 막힌 부모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죠?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관점에서 일심의 세계를 중심삼고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한마음을 그리기 전에는 한마음의 결과가 통일되지 않는 거예요. 한마음의 목적을 이루지 않고는 통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통일을 이루지 않고는 주관 못 하는 거예요. 즉, 거느리고 가지 못하는 거예요. 거느리는 것은 중심을 결정해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수단이나 방법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애기가 배고플 때는 어머니 젖을 먹여야 되지 물을 먹이는 방법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만 사랑을 가지게 되고, 심정이 연결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바라볼 때 세계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돌아가야 됩니다. 부모의 사랑도, 부부의 사랑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디로 돌아가야 되느냐?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말이 필연적으로 출현했던 것입니다. 이 심정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뼈와 살이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가고 우러나와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심각했던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는 예수님은 무조건 순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드리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 몽땅 드리면 몽땅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뜻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갖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가치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죽음의 지옥세계를 탈피해 가지고 부활권을 가진 것입니다.

부모가 가야 할 사랑의 길은 어떤 길이냐? 열 형제가 있다면 그 열 형제 가운데서 제일 불행한 자식과 동반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불구자의 동생이 있으면 그 동생과 더불어 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런 사람은 형제들 중에서 상속자가 되는 거예요. 부모의 사랑과 같이 동반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잘먹고 잘사는 자리가 아닙니다. 부모 앞에 열 형제가 있다 할 때, 그 열 형제 가운데 제일 못난 사람과 더불어 있게 되면 그는 부모의 사랑 세계의 계대를 잇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대한민국을 찾아올 때 하나님의 사랑과 가까이 서는 자리가 어디냐? 비참한 자리에서도 나라를 사랑하고, 불행한 자리에서도 나라를 염려하며, 불행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을 붙안고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자리가 아니겠느냐? 거기가 부모가 같이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를 떠나 농촌의 농민을 중심삼아 가지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과 사귀는 것보다 어렵고 가난한 사람과 사귀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더 찾고 싶어하시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도할 때 '저 사람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니까 전도해야겠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불행한 자식이기에 자기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자식이지만 그 불행한 자식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일심의 인연을 거쳐서 부모의 사랑과 동반할 수 있는 그 심정의 자리는 어디냐? 불행한 자식에게 마음을 두고 염려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의 마음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부모의 마음의 종지조상이기 때문에, 근본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쉬실 수 있는 곳, 그 나라를 향하여 찾아 가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 마음이 계실 수 있는 세계를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곳을 흠모하고 찾아가자고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주장인 것입니다. 일년, 혹은 십년, 백년, 천년 계속 그것을 주장할 때 우리들이 역사과정에서 다 쓰러질지라도, 지금 죽더라도 한이 없는 거예요. 왜냐? 여러분은 천년 후에라도 그 세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시간 관념으로 볼 때, 천년의 수가 이 세계에서는 먼 거리로 보이지만 영계는 시간을 초월하는 곳이기 때문에 먼 거리로 보이지 않습니다. 천년이라는 시간이 하늘세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