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집: 풀어놓고 풀어놓아야 할 하나님의 뜻 1959년 06월 1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12 Search Speeches

누구보다도 나를 " 사'하라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평화의 왕으로, 만민의 죄를 속죄해 주기 위한 구세주로 알고 있었는 데, 예수님께서는 놀랄만한 선언을 해버린 것입니다. 민족적인 면에 있어서도,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도, 국가적인 면에 있어서도, 가정적, 개인적인 면에 있어서도, 즉 존재하는 모든 것에 걸릴 수 있는 일대의 선언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마 10:35)"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이 있을 수 있어요? 더 나아가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하셨으며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의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순 중의 모순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이후 2천년 역사가 경과했지만 우리가 예수님 당시를 섭리의 종합시대요 섭리의 규합시대로 안다 할진대, 그 시대에 제창했던 말씀은 어차피 종말시대에 풀려야 됩니다. 성경 66권의 풀려지지 않은 모든 말씀도 종말시대에 풀려야 됩니다. 얽혀진 이 세계가 풀려야 되고, 얽혀진 어떠한 주권도 풀려야 도고, 얽혀진 어떤 사회, 어떤 가정, 어떤 개체를 막론하고 종말시대에는 풀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과연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여러분은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혁명의 언사 중의 혁명의 언사였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관념의 개재되지 않았고, 사랑하는 아들 딸에 대한 관념도 개재되지 않았고, 사랑하는 부부에 대한 어떤 관념도 개재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이 세계가 타락한 세계인 것을 인정하십니다. 이 역사는 어디서부터 출발하였느냐. 아담 해와가 사탄을 중심삼고 혈연관계를 맺어 벌어진 역사입니다. 천사장과 맺은 정을 기반으로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기반을 통하여 번식된 우리, 악을 중심으로 악의 씨를 번식하고 있는 국가와 민족을 하늘은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하늘의 고충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만 남겨 놓고 전세계를 쓸어버린 노아심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하늘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노아의 여덟 식구만 남겨 놓고 당시의 인류와 번식되었던 모든 것을 물로 심판해 버리셨던고. 하늘이 사탄의 피를 받고난 그 때의 인류와 만물을 심판하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이 심정과 연결될 수 있는 , 하나님을 중심삼고 마음과 몸을 화합하여 혈연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혈족과 만물이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인연을 맺은 혈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연 맺을 수 있는 혈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노아의 여덟 식구를 남겨 놓고 전세계 인류를 멸해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가 만민의 구세주로 오셨는 데 어떤 구세주로 오셨느냐. 어떠한 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러 오신 구세주가 아닙니다. 사회환경을 개척하여 행복한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구세주가 아니예요. 그러면 어떤 구세주였느냐. 만민의 생명을 하늘 생명으로 옮겨줄 수 있는 구세주, 하늘의 생명과 하늘의 이념을 갖추어서 하늘의 사랑을 즐길 수 있는 입장으로 만민을 옮겨줄 수 있는 구세주였습니다. 이런 내용을 갖고 오신 예수의 생애를 , 그런 심정을 갖고 오신 예수의 생명을, 그런 내용을 갖고 오신 예수의 사랑의 심정을 인간 중에 어느 누구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께서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고 탄식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기반으로 하신 말씀인가. 오늘날 세상의 어떤 주의나 사상, 혹은 어떤 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혹은 자신의 가정적인, 어떠한 정적인, 인정적인 기반을 중심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이념을 중심삼은 제도를 생각하면서, 그 새로운 제도권내에서 즐길 수 있는 생명의 실체를 꿈꾸면서, 나아가 그 실체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때를 그리는 심정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는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지극히 외로운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세상과 정반대, 세상과 180도 반대 방향의 내적인 심정과 세계관을 갖고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머물던 장소도 원수의 땅이요, 그가 살던 생활 환경도 원수의 환경이었고, 그가 지배받던 주권도 원수의 주권이었고, 그가 사랑을 찾고자 하는 곳도 원수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움직이는 데는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딪치는 것마다 원수였습니다. 원수.

그런 가운데서 하늘의 생명적인 기반을 세워 놓고 하늘 대신 개방운동을 해야 할 책임을 짊어진 예수, 하늘의 영원한 이념적인 기반을 세워 놓고 그 이념을 중심삼고 혁명을 일으켜야 했던 예수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어서 만민을 구원한 졸장부 예수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억천 만민의 심정 심정과 양심을 꿰뚫어 가지고 예수가 우하면 그들도 우하고 예수가 좌하면 그들도 좌할 수 있는 운동을 일으키려 했던 예수였습니다. 예수의 관심은 거기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