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집: 하나님 앞에 나를 얽어매자 1961년 02월 15일, 한국 전주교회 Page #202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한을 '기 위해 지옥 '창을 뚫어 승리해야 할 우리

여러분들은 자기가 좋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동기와 어떠한 복잡한 내용과 어떠한 이론을 거쳐 가지고 수천만 대 자기 선조들의 공적을 통해 여기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맺혀진 결실의 모양은 비록 찌그러지고, 작고, 보잘것없지만서도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정신만은 하나님이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여기 찾아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시대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온 여러분들을 지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여러분들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영원무궁토록 온 천상이나 지상에서 만민을 사랑할 수 있는 실적을 갖추고 있어 가지고, 어디를 가든지 영원한 자유의 심정을 걸어 놓고 하늘과 더불어 같이 행동하고, 하늘과 더불어 같이 살 수 있는 이런 입장을 개척하고 지도해야 할 책임이 여러분을 지도하는 선생님의 길입니다. 그런 길로써 여러분을 이끌고 가야 돼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길은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여러분들을 그렇게 고생시키는 자리더라 이겁니다.

그래 이번에 3년 기간을 책정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느냐? 여러분들, 더우기나 본부교회에는 서울의 무슨 대학교를 다니느니 어쩌느니 해서 뺀질뺀질한 여자들이 많다구요. 인텔리라 해 가지고 마사꾼들이 다 되었어요. 이런 사람들의 정신을 돌려놓기 위해 3년 이상 선생님이 고생을 했다구요. 그들은 모르지만 그들의 사상과 그들의 모든 것을 돌려놓기 위해서 유행가를 할 때도 있었단 말이예요. 기성교회 목사들은 `욕하지 말라! 이단이라고 때리면 조건에 걸릴 줄 알아라!' 하지만 좋다 이거예요. `너희들은 쳐도 이것은 세상과 더불어 다 쓰러질 수 있는 흔적이 되지만, 부활시대에 있어서 하늘에 남아질 수 있는 흔적은 못 된다. 내가 가는 곳,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너희들 눈에 지금 당장은 거슬리겠지만 내 목표는 세상과 더불어 썩어진 후에도 남아질 수 있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맞고 치면 몰리더라도 좋다' 하고 있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지금까지 잰다고 하는 여자들을 전부 다 꼬리표를 달아서 저 노동판에 보내서 탕감하게 하고, 호미자루를 들고 나서게 하고, 양복을 벗어 버리고 저 시궁창물, 똥거머리들이 욱실거리는 데 발을 들여놓고 잘 수 있게 하고 말이예요. 말없이 수년 간 그런 준비를 해 가지고 이 놀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누구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 말 듣고 한 줄 알아요?

여러분들이 여기에 움직일 수 있을 만한 이런 동기가 되었다는 것은 여러분들을 지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그런 각오와 신념을 갖춘 거기에 있어서 자기 마음이 자동적으로 움직여 들어감을 느꼈기 때문에 움직이게끔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 개인은 부락을 움직이고, 부락은 민족을 움직이고, 민족은 국가를 움직이고, 국가는 세계를 움직이고, 세계는 하늘땅을 움직여서 하늘의 원을 풀어 주자는 것이 복귀의 사명입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해야 할 책임입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들이 복받을 길이 어디냐 하면, 지옥 밑창을 뚫고 거기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갖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상을 받으면 천당은 가기 쉽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삼천만 민중 앞에 나선 우리들은 벌거숭이가 되고 굶주리는 일이 있더라도 가야 됩니다. `어느 곳에서라도 슬픈 심정을 품고 오시는 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어디로 올 것이냐? 이 도성이 사탄 도성이니만큼 오늘날 간첩 모양으로 남 모르는 비밀 장소로 찾아올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전에 와서 밤을 새우고 있을지 모릅니다. 알게 뭐예요?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이 어떤 놀음을 한 줄 알아요? 하늘이 또 어떤 놀음을 한 줄 알아요? 그러니까 일구이언할 것 없이 덮어놓고 가야 됩니다. 전체를 통괄적으로 보게 될 때 그렇게 가는 것이 정상적인 거예요. 앞으로 이 3년 기간에는 여러분들이 그런 기준에서 삼천만 민중과 인연맺고, 또 여기 선생님과 더불어 하늘과 더불어 인연맺는 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할 책임입니다.

슬픈 자리에서 내 아버지로 모신다면 그 아버지가 기쁜 자리에서 우리를 버릴 것 같아요? 오늘날 그렇잖아요? 어느 국가 어느 주권자가 한참 몰리게 될 때, 손가락질 받고 천대받는 자리에 들어갔을 때, 그의 옷자락 하나를 붙들어 준 사람이나 밥 한 그릇 대접한 사람은 그 사람이 때를 만나게 되면 전부 다 그 나라 앞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불쌍한 노정을 걸어오시는 아버지가 눈물 흘릴 때 같이 눈물 흘리고, 죽음이 고비치는 그 자리에서 같이 고비치는 그런 참다운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 아들딸 전부다 내 버리고 건달꾼 모양으로 복받겠다고 나온 그런 사람들 붙들어다가 보다 중요한 자리에 놓겠느냐 말이예요. 천만부당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세계에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지만 이런 신념과 이런 이념과 이런 생각을 갖고 나가는 무리가 삼천만 민중 가운데 불과 소수의 무리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무리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틀림없이 이 나라에 오시는 겁니다. 오게도 할 수 있고, 안 오게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