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집: 상봉의 기회 1971년 06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00 Search Speeches

하나님과 인간의 상봉

자기에게 어떤 소망이 있을 때 그 소망의 대상을 만난다는 사실은, 그 소망하는 내용이 크면 클수록 귀중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소망이 일대(一代)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소망일 때에는 그 소망의 주체 되는 것, 혹은 그 소망의 주체 되는 분을 만나는 시간은 역사적인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도, 그 나라가 소망하는 어떤 것, 소망하는 어떤 분, 즉 그 나라 전체에 있어서 역사적인 분을 만나는 그 시간은 역사적인 운세 앞에 있어서 가장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도 이 세계가 어떤 목적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데 그 목적을 성사할 수 있는 한 곳, 그 목적을 성사시킬 수 있는 한 분을 만난다는 것은 세계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상봉할 수 있는 시간을 잘 맞느냐 못 맞느냐 하는 것이, 자기 앞에 혹은 전체 앞에 그 기회를 유리하게 맞느냐 못 맞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합니다. 잘 맞고자 하는 것을 소망하고 나가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겠지만 잘 맞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 때를 맞는 데 있어서, 찾아오는 그 기회가 국가적인 기준이라면 국가로서의 운명길을 지내 나오는 과정에, 혹은 그 나라가 거쳐 온 여러 과정에 천운이 있었다면 그 천운을 맞은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가 열 번이 있었다면, 그 열 번 찾아오는 운세를 그 나라가 얼마나 적합하게 맞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열 번 가운데에서 여덟 번을 잘 맞았다면 잘 맞지 못한 두 번은 슬픔으로 남아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이 찾아오는 한 때를 맞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원의 기준은 과거에 두 번 맞지 못하였던 것까지도 탕감시켜 놓고 역사시대에서 맞이했던 어떤 때보다도 더 가치있게 맞이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시고 과거에 하늘의 운세를 만나지 못하였던 그 민족 앞에 다시 찾아올 것이 아니냐? 과거의 어느때보다도 더 잘 맞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셨는데도 불구하고 또 못 맞게 될 때에는 거기에 과거 열 번 가운데 두 번 맞았던 그 슬픔까지 플러스시켜 가지고 그 슬픔과 더불어 돌아설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냐? 이런 문제를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귀섭리를 추진해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역사과정을 미루어 볼 때에, 하나님은 어느 한때 인간과 상봉하기 위해 찾아 오시지 않은 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개인이 자기의 선조가 지내온 역사적 과정과 전통이 다름에 따라서 현실에 처해 있는 입장이 전부 다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천태만상의 사연을 중심삼아 가지고, 개개인의 성품을 따라 사망권내에 있는 인간들을 부활권내로 돌이키기 위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찾아오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소원의 목적을 감당하고 그 뜻 앞에 일치될 수 있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원 앞에 사랑받을 수 있고, 칭송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런 환경, 혹은 그런 자리에서 그분을 맞아들이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기쁨으로 대하실 것입니다. 기쁨으로 대해 가지고 기쁜 사연으로 연결하고 기쁨 가운데서 끝을 맺고 기쁨으로 남아지게 될 때는, 만났다가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마음, 다시 기쁨으로 만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만난 자리보다도 더 가치적인 자리를 중심삼고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돌아설 것이며, 그런 기쁜 자리에서 상봉의 시간을 가진 우리 자신들도 지금 하나님을 만났던 그 이상의 기쁨의 자리를 미래의 소망으로 남기고 헤어질 것이 아니냐? 이렇게 헤어졌던 입장에서 다시 만나는 자리는 어떤 자리가 되겠느냐? 하나님은 그 자리가 옛날보다 낮은 자리이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그 자리가 보다 높은 자리이기를 바랄 것이고 가치적인 면에서도 옛날보다 그 내용이 확실한 자리, 혹은 보다 높고 보다 귀한 자리이기를 바랄 것이 아니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일생을 살아 나가면서 어떤 소망, 혹은 어떤 뜻을 품고 나가는 데 있어서 그 뜻의 때와 혹은 그 뜻을 중심삼은 어떤 사람을 만나는 자리가 자기가 바라 나오던 소원과 일치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거기에서 일치되어 가지고 헤어지게 될 때에는 다시 새로운 목적을 중심삼고, 새로운 사명을 중심삼고 헤어질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만났을 때 그 이하의 내용을 가지고 헤어지게 된다면 누구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멀어지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기쁘게 만났다 헤어진다 하더라도 헤어지는 그 자리가 내일의 소망을 가일층 다짐할 수 있고, 더 높은 소망의 터전을 소원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헤어지는 자리가 되어야만 역사적 발전이 제시되는 것이요, 우리가 소망하는 기쁨의 내용이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게 될 때에는 상봉의 시간을 맞지 않았던 것보다 못하고 상봉의 장소를 맞지 않았던 것보다 못하다는 것은 두말할 바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을 중심삼고 그러할 것이고, 가정을 중심삼고 그러할 것이며,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그러할 것입니다. 세계면 세계를 중심삼고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천태만상의 선수들이 운동장을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간들이 순차를 달리해 가지고 어떤 목적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의 어떤 소원성취의 한 때와 소원성취의 한 곳을 향하여 움직여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년 시대를 지내곤 청년 시대를 지내고, 장년 시대를 지내고, 노년 시대를 거쳐갈 것입니다. 이렇게 갔던 조상이 선하였으면 그 후손이 선한 바톤을 이어받아 가지고 갈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연결된 역사적 사연들을 품고 그 무엇인지 모르게 전진일로에 서기를, 혹은 발전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희망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이 오늘 인류의 군상들이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