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집: 소망의 조국의 슬픔 1965년 11월 01일, 한국 광주교회 Page #299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지도 방법

이스라엘 민족이 어찌하여 선민의 기업을 갖고 나왔느뇨? 이런 역사적인 사망의 세상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한 사람을 빼 가지고, 구별시켜 가지고, 이 세상을 부정시켜 가지고 여기에서 이것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대의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보라구요. 노아 할아버지에게 120년 동안 방주를 짓게 했는데 강가나 해변가에 방주를 짓게 하면 얼마나 멋지겠나 이거예요. 그러면 누구든지 다 공인할 겁니다. '그 할아버지 참 큰 배를 지을 모양이군. 뭘하는 지는 모르지만 말이지' 이럴 거라구요. 그러나 하나님은 억지로 역설적인 방법으로 지도합니다.

저 아라랏산 꼭대기에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라고 하면 그거 믿겠어요, 여러분들? 저건 미치광이나 정신 빠진 녀석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반대적인 입장에서 명령하지 않으면 안 될 하늘의 곡절이 있었느냐? 세상과 백 퍼센트 반대의 길을 길을 가려니…. 사람이라는 종자는, 이 천지지간의 모든 종자는 전부 다 부정할 수 있는 자리를 빨리 만들어 놓아야 된다는 겁니다. 빨리 만들어 놓아야 빨리 해결된다는 겁니다. 세상 만사가 경계선을 넘어 가지고 딴 나라, 하나님만이 간섭하실 수 있는 경계선을 만들려니 그 방법밖에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 120년 동안 어떠했겠느냐?

노아의 부인이 어떻게 했겠어요? '아 우리 영감, 저 아라랏산 꼭대기에 배 만들어서 이 다음에 고기잡이를….' 그랬을 것 같아요? '어, 하나님이 며칠 동안 물심판 하실까?' 뭐 부처 (夫妻) 끼리니까 그런 얘기 했을는지 몰라. 그러나 '저놈의 영감이, 저거 집안 망하려니 별의별 놀음 한다'라고 말했을 거예요. 무슨 조롱을 안 했겠어요? 가만 생각해보라구요. 부인들. 여러분 남편이 120년 동안 까뀌를 메고 나무 토막을 메고 아라랏산 꼭대기에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올라가서…. 금이 생겨요, 뭐가 생겨요? 120년 동안 그랬다면 밥을 줄 수 있는 부인들 계셔요? 뭐 10년도 못 간다구요. 열두 달도 못 갈 거라구요, 한국 부인들은.

나는 이번에 중동 지역을 돌면서 '야, 여기가 사막 지대로구만. 옛날 노아 할아버지는 불쌍한 자리에서…. 어디에서 나무를 구해다가 배를 만들었노?' 이런 생각 했다구요. 이것은 자연적으로 세상을 부정시키기 위한, 격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알겠어요? 「예」 여러분이 그걸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하늘의 작전인 것입니다. 완전히 격리해야 됩니다, 누구 한 사람 편 되는 사람없이. 그래서 자기 부인도 반대했다는 거예요.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만 말입니다. 저놈의 늙은이가 죽어야 우리 집안이 되겠다는 거예요. 돈이 나올 것 같은 건 다 팔아 가지고 했다는 거예요. 그걸 120년 동안한 거라구요. 수많은 사람들은 전부 다, 눈 갖고 귀 갖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전부 다 반대하지 않는 녀석이 없게끔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완전섭리다,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다 이거예요.

이 노아가 120년 동안 고생만 하고 참소받고 수고했는데, 그 분하고 원통한 것을 복수하려면 이 세계 인류를 열 번 쳐죽여도 사탄세계는 꼼짝못할 그런 조건이 생겼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같이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선민권에 이바지해 온 선조들은 전부 다 역설적인 그런 생활환경을 취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겁니다.

아브라함을 보라구요. 우상 장사의 아들로서 잘살고 있었습니다. 뭐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돈을 쓰려면 돈이 없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호화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야 아브라함아, 갈데아 우르를 떠나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방의 국경을 몇 개씩 넘어 애급까지 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뭘했는지 알아요? 집시의 무리, 유랑민이 된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나라의 백성이었고, 어머니 혹은 자기 가족으로부터 사랑받는 아들로서 살았지만 홀연히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아 가지고 행랑 보따리를 챙겨 천리만리 방랑길을 자기의 소망의 길로 알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길을 떠났던 겁니다.

그거 어떻겠나 생각해 보라구요. 낙망을 하려면 천 번 낙망할 수 있는 것이요, 탄식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을 한다면 하나님도 원망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왜 이렇게 사막지대를 거치게 합니까? 이런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뭐 사랑의 하나님이야? 하나님은 미쳤어'라고 하면서 원망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몰랐다는 겁니다. 선조들은 그걸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건 완전히 분별하기 위해서였다 이겁니다. 아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