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집: 참씨를 얻기 위하여 1967년 12월 2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45 Search Speeches

튼튼한 신앙을 위해 필"한 것"

탕감복귀는 핵심이 결정되지 않은 존재를 중심삼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3년 이상 되었다는 여러분은 몇 점짜리냐? 자신이 몇점이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7년, 혹은 초창기에 선생님을 만나 지금까지 죽 따라나온 그 종착점이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성경의 포도나무 비유에도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줄기와 하나 되어야만 살아 있는 가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본질적인 모든 요소가 줄기와 같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즉 뿌리를 통해서 진액을 빨아들이는 작용도 같아야 되고, 줄기에 뻗어지는 진액이 흡수되는 작용도 같아야 되고, 또한 철따라 자라는 속도도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안 되어 있거든 갖추어야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 각자가 해야 할 책임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봄철이 피동적인 철이었던가, 주동적인 철이었던가? 피동적인 봄철이었다면 어떻게 주동적인 봄철로 맞이할 것이냐? 주동적인 봄철을 맞이하려면 완전한 씨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피동적인 여건이라면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피동으로 끝나 가지고는 복귀의 완성이 안 됩니다. 그래 가지고는 개인을 중심 삼아서 가정으로 연결시킬 수 없고, 가정을 중심삼아서 종족, 민족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발전해 나오는 데에 있어서 우리 식구들은 전부 피동적이었느냐, 주동적이었느냐? 피동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주동적인 환경으로 변경시켜 놓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목적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말씀이니 인격이니 심정이니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논의하고, 하나님의 사정을 논의하고, 하나님의 소원을 논의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피동적인 자리에서는 이것이 필요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개체가 어느 한 때에는 피동적인 환경을 박차 버리고 주동적인 환경을 확립하는 운명의 노정을 가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동적이 되려면 하나님의 심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심정과 사정을 중심삼고 현실에서 미래까지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자기 스스로 역사적인 무대를 위주한 현실 세계에서의 하나의 새로운 주체성을 지니고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승리적 기반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체요 천주의 주체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역사 시대를 거쳐와서 역사의 주체인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사정과 하나님의 소원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피동적인 입장에서는 주체만 없으면 사탄은 언제나 공격합니다. 주동적인 주체가 없을 때에는 사탄은 언제나 공격태세입니다. 사탄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산산조각으로 파멸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개인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동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동지만으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동지의 기준을 넘어서 자신과 피살을 연결시키고 생사의 결정적인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신앙의 자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열 두 제자를 중심삼고 신앙의 동지로서의 3년 공생애노정을 거쳐갔지만, 최후에는 피살을 나눈 부자의 인연으로 연결시켰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최후에는 제자들을 중심삼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동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왜? 많은 원수들이 공격해 올 때 이것을 함께 막아내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신앙의 자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왜? 내 가정생활의 행복을 꿈꾸고 새로운 생명의 기틀을 다져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