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집: 심정과 공적 생활 1970년 08월 11일, 한국 부산 동명장여관 Page #131 Search Speeches

기도와 심정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기도를 해서 풀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 것이냐? 기도는 하나님의 심정적 기준을 중심삼고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진정한 의미에서 나라를 염려하고 하나님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전후를 가르쳐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선생님이 알고 있는 한 아주머니가 있는데, 이 아주머니는 지금 선생님을 만나려 해도 내가 안 만나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10월쯤에는 어떻게든지 한번 만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10월에 만나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급이 그만큼 낮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조직세계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영급이 맞지 않으면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무때나 만날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산에서 기도를 하면서 혼자 정성들여 가지고 영계를 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에 대해서 기도를 하려고 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먼저 불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기도가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까는 칠성님을 모시고 나왔는 데, 칠성님을 부르면서 기도하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해야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신자의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춤을 추게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계속 기도하게 허락하실는지 안 하실는지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시대가 지나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지나친 기도는 시키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종이 아들을 대신하여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에 가려면 자기의 책임을 다 하고 선조들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안팎의 모든 내용을 갖추어야 그것이 공인받을 수 있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허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주머니도 이런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을 위해 일생 동안 기도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하게 되면 신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노래가 나오고. 더우기 놀라운 것은 그 아주머니가 국진 아기가 임신되는 날, 낳는 날을 미리 다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밀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아기가 태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누가 가야 된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참 신통합니다. 그렇게 세밀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을 위해서나 선생님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천상세계에서 직접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텔레비젼 보듯이 빤히 보고 다 안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지금 뭘 하고 있고,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가 하는 것까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온갖 정성을 한 곳에 들이게 되면 그렇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런 사람들이 선생님을 따르고자 하느냐? 그것은 심정적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심정세계에서는 아는 것 가지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심정과는 차원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거예요.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 원리 하면 세상에서 보통 말하는 원리가 있고 창조원리가 있는데 창조원리 가운데 입체적 원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입체적 원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했다고 문제시하지 말아요. 사랑은 인간이 성숙되어야 느껴지는 것입니다. 심정적 내용이 달라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영통해 가지고 아는 사람들은 라디오를 듣거나 신문을 보아서 아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보아서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듣고 보아서 알기 전에 이 문제를 제시하여 발표하는 그때까지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정적 유대관계를 맺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에서 국가의 모든 문제를 논의할 때 대통령을 중심삼고 각료들이 심정적 유대관계를 갖지 않고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훌륭하다고 해도 그것을 문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전부다 심정적 문제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이 선생님을 대해서 더 높이고 위하고 정성들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정적인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심정의 세계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를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심정의 세계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