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집: 천국은 나로부터(2) 1971년 07월 2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99 Search Speeches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

자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천국이라는 것이 우리가 앉아서 믿고 있으면 갈 수 있는 곳이냐? 그렇게 바란다면 그것은 망상입니다, 망상. 천국은 누구로부터 이루어지느냐? 선생님으로부터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되어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천국을 이룰 수 있는 사유와 재료는 제시할는지 모르지만, 여러분 자신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된다는 것은 놀면서 남이 가게 되면 나도 가고 남이 가지 않으면 나도 안 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딱 결정을 해 가지고 그것을 중심삼고 짜임새 있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타개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적인 신앙을 해야 합니다. 통일교회를 믿느냐 할 때 절대적으로 믿고 간다고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할 때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였습니다.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할 때, 예수님이 웃으면서 이야기했겠습니까? 그런 생각 해봤어요?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표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벙실벙실 웃으면서, 농담하면서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심각했을 것입니다.

일대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심각한 자리에서 베드로를 바라보았을 것이 아니겠어요? 그 시선에는 천하가 엇갈릴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 대한 절박감을 가지고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 음성 또한 생애에 없었던 비장한 음성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태도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묻게 될 때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베드로가 대답한 걸 보면 그는 우둔하다면 우둔한 사람입니다. 잘못할 것을 뻔히 알고 세 번씩이나 묻는데도 당당코 '이 사람들보다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훌륭한 점도 있습니다. 그는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것을 확실히 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잘못했을 때는 백 퍼센트 단념하고 근본적으로 청산짓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청산을 했으면 틀림없이 청산했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회개했으면 그 회개가 하늘의 공인을 받은 회개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신앙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세 번씩 묻는 물음에 대하여 당당하게 자신있게 대답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 대해서 '야 아무개야, 네가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절대적 신앙을 하느냐' 하고 세 번씩이나 물어 볼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요? 신앙을 하는 것도 자신이 없는 여러분에게 '아무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묻게 될 때 '내가 이 사람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요? 자신 있어요? 그러한 내용이 없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그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서서 옛날에 예수님을 모시던 때보다 몇백 배의 신념과 결의를 할 수 있는 자신임을 자각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자신을 높이 평가한 안정된 기반 위에 섰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정하더라도 그것을 절대적인 부정으로 돌릴 수 있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런 터전에서 예수님이 그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에게 '야, 아무개야! 네가 통일교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묻게 될 때 '아, 내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하나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자신 있어요? 그것이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한 번뿐만 아니라 세 번씩이나, 물을수록 더 심각해질 것이고, 물을수록 더 절박해질 것이고, 물을수록 더 기가 막힌 장면이 그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것도 깔고 넘어갈 수 있는 각오를 해야 하고 결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 결의를 하고 과거를 용서받고도 남음이 있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그런 터전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그를 중심삼고 출발했던 것이 아니냐? 자, 그러한 신앙을 갖고 있다는 사람은 손들어 보십시오. '그런 것을 물어 볼 게 뭐야? 하며 기분 나빠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여러분이 기분 나빠해야 선생님이 좋아하는 거라구요.

이런 근본적인 자세를 두고 볼 때, 내가 믿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해 봐요. 오늘 저녁 집에 들어가면 말이예요. 그래프를 그려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1960년대는 어떻게 믿었고 지금은 어떻게 믿고, 어느 점에서 왔다갔다하느냐 하는 것을 그래프로 그려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심령선 도표를 그려 가지고 1960년이면 1960년의 몇 월은 올라갔고 몇 월은 내려갔는지 그려 보라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믿을 때는 미친 호랑이처럼 세상의 짐승을 다 잡을 듯이 날뛰더니 1년 지나서는 떨어지구 2년 가고 나서 뭔가? 3년 가고 나서는 아이쿠, 4년째 가서는 오줌을 쌌는지 똥을 쌌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농담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돼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보시면서 '너는 영구한 터전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신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다. 행동과 믿음에 있어서는 통일교회에서 너만은 기준에 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행동은 제쳐놓고 거기에 보충될 수 있는 기대가 세워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리에서 말하는 상대기대가 갖추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상대기준을 통해 가지고 상대기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상대기대가 없어 가지고는 존재기대가 형성이 안 됩니다. 그 상대기대가 돼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