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집: 뜻의 완성과 우리의 사명 1974년 12월 31일, 한국 중앙수련원 Page #280 Search Speeches

어떠한 일이 있"라도 천리의 공법은 세워 "아야

그렇기 때문에 뉴욕 타임지에는 대한민국 기사가 있더라도 말이예요. 한 구석에 이만큼 내는데 레버런 문 기사는 일면에 전부 내고 반 페이지까지 전부 다…. 그게 그 사람들이 미쳐서 그래요? 왜? 뉴욕시의 전 시민들로부터 하루에 몇백 번 전화가 온다구요. 레버런 문에 대해서 밝히 해명해라 이거예요. 자, 이거 서구사회가 전세계를 지배했는데 우리 백인들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말이예요. 난데없는 동양 사람이 와 가지고 서양 사람 눈을 삐딱하게 만드니 기분 나쁘다 그 말이예요. 밝혀라! 밝혀! 흑암이 있을 거다!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이러는 거예요. 밝혀야 뭐 있어요? 문선생 불알 두 쪽밖에 없는데…. (웃음) 왜 웃어, 왜?

나도 임자네들과 다 같다구. 점잖은 게 뭐야?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이 제일 점잖은 거예요. 교수님들이 와서 '야! 공석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데 공석에서 그런 얘기해야 자연스럽지. (웃음) 그래야 한 번 또 웃고 넘어가지 않아요? 나도 말하기 힘들다구요. 한 잔 먹고 하자구요. (웃음) 그만 두자구요? 결론을 내려면 3분 이내에 다 낸다구요, 결론. 싫으면 그만 두자면 그만 두자구요, 민주주의 식으로. 그만두자요? (웃음) 하자구요, 그만두자구요?「합시다」 대답이 그만 두자는 말이구만. 하자구요, 그만두자구요?「합시다」 이렇게 몇 번씩 다짐하면 할수없이 하자고 하는 거지. (웃음)

선생님이 서양 사람들을 가지고 잘 논다구요. 통역을 세워서도 웃기려면 웃기고 울리려면 울리고 말이예요. 그런 능력이 있다구요. 자! 이제 세 시간 했다구요. 네 시간은 해야 사위기대를 복귀하지 않나? 오래간만에 만나지 않았어?「예」 내가 이제 오늘 만나게 되면 이제는 며칠 동안 못 만난다구요. 이제는 만날래야 만날 수 없게 된다구요. 자, 또 하자구?「예」

그래 가지고 결혼식을 해줘 가지고 말이예요, 이런 놀음 해 가지고 개인적 자리, 가정적 자리, 종족적 자리, 민족적 자리, 국가적 자리에 다 나가 가지고 대한민국에 있어서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가정적 십자가의 3년노정을 통일교회에서 가라! 내가 무자비하다구요. 저 길가에서 그 어미 아비 들어와서 만나 가지고 이렇게 붙들고 이러는 걸 보고 '에이! 이녀석들아! 치워라? 그랬어요. 가슴이 아파도 할 수 있어요?

내가 죽더라도 천리의 공법을 세워 놓고 죽겠다는 거예요. 내가 내 자식을 그렇게 대했고 내 여편네를 그렇게 대했고, 전부 다 그렇게 대했어요. 내 자식을 그렇게 대해 나왔다구요. 남의 집살이 시키면서 내가 손목을 한번 안 줘어 봤어요.그렇다고 싫어서 그런 게 아니예요. 천리를 세우려니, 원리대로 살려니 할수없다구요.

이래 가지고 미국 땅에 가서 3년노정을 중심삼고 가자! 당당히 가자! 여러분, 이걸 알아야 돼요.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 그거 문선생이 하느냐, 하나님이 하느냐 하는 게 문제예요. 단 한 가지는 내가 죽을 기력이 어느 선인 줄 알고, 내 힘의 한계점이 어디인지 내 안다구요. 거기까지는 가야 돼요. 그 이상은 갈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도 사탄도 꼼짝 못해요.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미국의 젊은 사람들도 만나게 되면 열두 시가 아니라 한시 두시가 되어도 안 일어서는 거예요. 선생님이 안 일어서니까 '아이구, 가 자야 할 텐데…' 하는 거예요. 왜? 한 생명을 위해서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내가 잠이 오지만 극복해야 돼요. 아침을 안 먹고, 점심을 안 먹어도, 아침에 둘러 앉으면 점심때나 저녁때까지 얘기하는 거예요. 배고픔도 극복해야 돼요. 그런 거예요. 내 한계선을 넘어서….

하나님이 나를 보고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하고, 사탄까지도 '그 이상 할 수 없다'고 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넘기 위하여 발을 들고 쓰러지겠다고…. 그 정신이예요. 그것밖에 딴 것 없다구요. 발을 들고 쓰러지겠다…. 거기에서는 기적이 벌어지더라 이거예요.

오늘날 통일교회의 재산을 만든 것이, 2년 8개월 동안에 막대한 재산을 만든 것이 다 그런 원칙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수십 년 동안 정성들여서 공장을 만들었어요. 청파동에서 여기를 왔다갔다하려면 한 시간, 두 시간까지 걸리는 거리를 하루에 세 번까지 드나들었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