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집: 섭리적 현시점 1972년 06월 05일, 한국 중앙수련원 Page #299 Search Speeches

하늘이 택한 선민을 누구보다도 존'시했던 모세

또, 모세를 두고 봅시다. 바로 궁중의 왕자처럼 호화찬란한 영광을 누리고 있는 모세로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고생하면 했지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또,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면 싸웠지, 모른척 하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하늘이 택한 선민을 어떠한 나라나 국민보다 더 숭배하고 존중시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하늘이 택해 세운 그 선민 한 사람을 어떤 주권 국가의 왕자나 왕보다도, 주권 국가 전체보다도 더 가치 있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이 모세를 훌륭하게 본 동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매일같이 애급 민족으로부터 채찍을 맞고 애급 민족의 호령에 움직이고 있는 비참한 이스라엘의 한 개인을 동정할 때 한 개인으로 안보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가는 길에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싹틀 것이다. 그 개인이 억울한 자리에 설 때 그것을 방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저들을 위하고 옹호하는 자에게는 기필코 하늘이 같이하게 될 것이다. 저들을 위해서 생명을 각오하고 나서게 되면 기필코 하늘이 같이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책임지고 나서는 모세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동기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편이 되어 애급 사람을 때려 죽였다는 거예요. 때려 죽인 것을 자기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미래에 하나님이 가는 길이 평탄한 노정이기를 바라고, 하늘이 승리한 터전을 바라고, 하늘이 하나의 승리적 주권을 가지고 애급까지도 지배할 수 있기를 소원하고, 그 나라의 충신과 그 나라의 애국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법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거라구요. 땅은 비록 사탄세계요,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요, 그 국가의 치리를 받는 국토이지만, 하늘을 위하는 충성의 심정을 가지고 오직 하늘을 세우고자 행동하고 그 나라의 주권을 위하여 생명을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은 애국자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으로 싸우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당하는 고역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애국자의 고역의 길인 것입니다. 그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주권이 있다면 그를 옹호해 줘야 되고 보호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이 하늘에 있다는 것,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깊은 곳까지는 모세가 생각하지 못 했을지라도, 모세를 대하는 하늘은 모세의 충절과 절개와 지조를 바라보고 모세의 행동이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미래의 축복의 나라를 그리는 애국심의 발로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홀로 목자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모세를 보호해 준 것입니다.

때 아닌 때에 하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근원과 동기를 지닌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40년 생활 가운데 있어서도 언제나 애급 사람을 때려 죽인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애급 사람을 때려 죽임으로 말미암아 내가 광야 생활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내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 생명이 끝나더라도 나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어버릴 수 없다' 이것이 틀림없이 모세의 전통적 사상이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은 궁핍했을 것이고 부딪치는 환경은 위험하고 부자유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 몰리면 몰릴수록 과거를 회상하는 때가 얼마나 많았겠느냐는 것입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의 영광스러운 생활에서 비참한 이스라엘 민족의 편이 되어 가지고 애급 사람을 죽이기까지에는 '내가 여기서 쫓겨나더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버릴 수 없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결심을 하고 난 후에 그런 일을 단행했을 것이 아니냐?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늘을 위한 것이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그 애국자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 중에 쓰라린 환경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모세의 생활에 고독이 깃들고 눈물어린 환경이 찾아와 그 환경이 억세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배후에는 하늘의 동정의 마음이 가중되어 들어가는 내적인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모세는 밤이면 홀로 외로이 누워 자는 잠결에도 이스라엘 나라를 잊어 버릴 수 없는 그 심정, 하루하루 고달픈 생활권내에서도 그 누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애급을 원망하는 그 마음, 자기에게 부딪쳐 오는 모든 자극을 자기 일신의 고통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고역 가운데로 몰아넣는 악의 주권자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연속되는 생활을 해 나갔기 때문에, 4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도 하나님은 또 다시 모세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데 있어서 모세 이상의 신념을 가지고 모세 이상으로 이스라엘의 나라와 주권을 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초라한 목동의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모세를 일깨워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책임자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목자로서의 40년 생활은 어떤 생활이었냐? 이스라엘 선민을 거느리기 위한 준비생활이니, 40년 이상의 수난길이 앞으로 부닥쳐 오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힘을 기르는 연단(鍊鍛)과 시련 기간으로 하나님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를 다시 내세워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모세가 고독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인연을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뭣이냐? 소망의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소망의 이스라엘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생활 환경을 넘어 내일의 희망의 돛과 같이 그 마음속에 추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려운 40년 미디안 광야 생활도 무난히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만일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자기의 지난 일을 생각했다면 바로 궁중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꿈꾸었을 것이니, 그 환경이 그리워졌을 것이고, 자기의 환경과 비교하여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서러워졌을 것이로되 그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는 입장에 선 모세였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리에서 다시 이스라엘 민족의 주인의 자리에 불리울 수 있는 인연이 엮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모세는 완전히 때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때를 잃어버렸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하늘앞에 때를 갖지 못한 사나이처럼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에게는 때를 고대하고, 하늘이 약속한 그날을 고대해 나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 주고자 하는 마음과, 잃어버린 때와 환경을 극복해 넘어갈 수 있는 충열의 지조가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다시 묶을 수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를 구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남모르는 내정적 심정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 있어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심정을 따라서 동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숱한 심정적 내연이 배후에 묶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사람은 기필코 하늘을 대표한 하나의 때를 맞게끔 해줘야 되는 것이 하늘의 책임이요. 또 맞아야만 되게끔 되어 있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