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집: 남북통일의 기수가 되자 1987년 05월 01일, 한국 한남동 공관 Page #244 Search Speeches

배포도 컸던 성진 어머니

참 이거 사연이…. 내가 어쩌다가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나? (웃음) 잘 걸려들었네, 이것들! (웃음) 그래, 좋아요, 젊은 놈들은 관심이 많을거니까, 걸려들어도 내가 일을 시켜 먹을 테니…. 이래 가지고 12월달에 약혼을 하고 결혼을…. 어머니 아버지도 내 말을 듣게 되어 있지, 내가 어머니 아버지 말을 듣게 되어 있지 않았다구요. 그땐 내가 취직을 하려고 한 때였어요. 하르빈 저 위에 해란이라는 곳, 그때 말로 파이라고 했어요. 거긴 러시아 사람, 몽고 사람, 중국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앞으로 일을 하려면 아시아에 있어서 러시아 말, 중국 말, 몽고 말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만주전업에 취직을 했어요. 학교에서 추천을 받아 가지고 부임날까지 받아 가지고 고향을 나왔어요. 그 바람에 약혼을 했지만, 그때 가만 보니까 정세가 좋지 않겠어요. 만주를 들어가면 좋지 않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만주전업으로 부임할 수 있게 임명장을 받았지만, 안동 지점장을 만나서 내가 이러이러한 사정 때문에 못 가겠으니 회사를 그만둔다고 이야기를 하고 퇴사 수속을 밟기 위해서 안동현에 갔어요. 안동현을 갔다 오는 도중에 곽산-정주에서 신의주를 가자면 다음 다음 역이예요-으로 갔어요. 거기 갔다가 나오던 길에 약혼만 해 놓고 결혼도 하지 않은 신랑이 처가집에를 간 거예요. 앞으로 장인 장모 될 분들을 찾아간 거라구요. 색시를 찾아간 것이 아니예요. 무리한 놀음을 안 해요. 색시집을 찾아가는 것은 결혼 날짜를 정하기 위해서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어요. 재미있다기보다 참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거예요. 안동에서 나오는 차가 늦어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에 내렸어요. 역에서 시오리가 되는데, 걸어가니 밤이 되었더라구요. 그때가 바로 눈이 내리던 때였어요. 최씨네 문중에서는 아직 결혼은 하지 않고 약혼만 한 신랑이 집에 찾아가는 것은 결례로 되어 있었다구요. 그래서 내가 형님과 누님을 통해 연락을 해 놓았는데 형님이 만주전업에 연락해야 되는데 그만 깜박 잊어버렸네. 그걸 모르고 찾아간 거예요. 약혼한 총각이 결혼도 안 했는데 찾아오니까 문중에 좋지 않은 소문이 나는 거예요. 저 집에는 약혼만 한 신랑이 왔다갔다한다…. 이러니 좋지 않거든요.

결혼 날짜를 정하기 위해서 찾아들어가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맏처남이라는 사람이 나오더니 '우리 최씨 문중에서는 결혼하기 전에 신랑 될 사람이 찾아와서 이러는 법이 없다' 이러는 거에요. 그러니 자기문중에서는 나를 맞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돌아가라 이거예요. 그거 보면 가문은 괜찮은 가문이지. 아무리 그 무엇이라도 전통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한 것이니까. 팔도강산을 주름잡고 일본 천지를 주름잡고 다닌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건 사리에 맞는 말이라서 '아 그러냐'고 그랬다구요. 그래서 이왕 왔던 바에… 작은 처남댁이 그 앞에 세간 나서 있었는데 거기가서 '내가 이렇게 되어 가지고 이 기회에 왔기 때문에 인사라도 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인사를 했어요. 원래는 이러이러한 내용 때문에 날짜를 정하러 왔는데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날짜를 정하지 못하고 간다고 말이예요. 그러고는 그 바람으로 신발도 벗지 않고 그냥 그대로 뒤로 돌아서 나선 거예요. 나서서 70리 길을 밤에 돌아갈 준비를 한 거예요. 그때는 기차도 없거든요. 시골에 기차가 하루에 한두 번 있지 매시간 있나요? 그래서 70리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어요. 함박눈은 내리고 아주 시적인 장면이 벌어진 거예요.

내가 떠난 후에 장모가 돌아와서는 큰 난리가 벌어졌어요. 장모가 와보니 문제가 크거든 이건 파혼이 벌어진다고 이래 가지고 아들을 대해 책망하고 작은 아들을 불러 가지고, 어디 그럴 수 있느냐고…. 이렇게 되니까 성진 어머니가 그걸 알았거든요. 큰집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두말하지 않고 차림을 하고는 나선 거예요. 보통 여자가 아니라구요. 뭐 만나서 이야기나 해봤나? 약혼할 때 자기가 척 고맙다는 인사 하고는 갈라졌는데 말이예요. 자기 집에 왔다가 문전박대받다시피 하고 돌아갔으니 틀림없이 파혼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백발백중 파혼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내가 집에 돌아가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문중에서도 문중을 찾아온 사윗감을 박대했으니 여기에 찾아왔던 아들의 면목과 문중의 위신이 어떻게 되느냐 이거예요. 그러면 문중이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파혼되는 것은 결정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장인 장모나 처남 전부가 내가 떠난 다음에야 그렇게 알지 않을 수 없었다구요.

이렇게 되니까 성진 어머니가 책임을 지고 말이예요, 처녀 몸으로 혼자, 어머니 아버지한테 인사도 안 하고 자기 오빠한테 인사도 안 하고 뒷문으로 나선 거예요. 보통 여자가 아니예요. 내가 한 2킬로미터쯤 갔는데 어떤 여자가 '여보' 하고 부르는 거예요. 밤에 어떤 여자가…. (웃음) 이게 무슨 요사스런 도깨비나 몽달귀신이 아닌가 의심을 하고 난 그냥 걸어간 거지요. 달려오더니 내가 왔다고 이러는 거예요. 누군가 보니까 성진 어머니거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집의 모든 문제는 자기가 책임질 테니까 돌아가자는 거예요. 성진 어머니의 성격을 그때 내가 알았어요. 자, 이 여자가 보통 여자가 아니구나. 아주 배포도 크고 말이예요.

그러나 그런 입장에서 무슨 얼굴로 처가집에를 다시 들어가요? 그래서 안 간다고 했지. 안 간다고 하니까 50리길을 따라나선 거예요. 정주까지 50리 길을 밤을 새우면서 따라나서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사연을 쭉 얘기하는 거예요. 그때가 엊그제 같아요. 자기 오빠가 위수술을 했는데 개의 위로 대치해서 넣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씩 정상적이 아닌 이런 신경질을 내서 집안에 불화를 가져 왔다는 그런 역사를 쭉 얘기하는 거예요. 이건 자기 집안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라고 하면서, 그런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러지 세상에 누가 신랑에게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그러는 거예요. 자기 집이 기독교 집안으로서 교회를 지었고, 서양 사람까지도 모실 수 있는 이런 집안이고 그런 오빠들인데, 그런 일은 자기 집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일장 이야기를 하는데 아주 뭐 설법이 아주 이력이 났더라구요. 50리를 따라오면서 설득한 거예요.

50리를 걸으며 떡 이렇게 밤을 새워 왔으니 잠이나 잤겠어요? 피곤한 가운데, 나는 모른척하고 가만 있는데 성진 어머니가…. 여잔 그래야 돼요. 선생님 왼팔을 끼고 용서하라고 하는 거예요. 미끄러지겠는데, 눈은 내리고 할 수 있어요? 서로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자고 해서 처음으로 만나서 그렇게 끼고는 50리 길을 걸어왔다구요. 그게 생생하다구요. 50리를 걸어왔지만 아침에는 집에 보내야 되는 거예요, 예(禮)로 말하면 안 그래요? 총각이 결혼도 안 한 처녀를 데려다가 하룻밤을 지냈다면 문제가 크다구요. 그러니 소문 안 나게 새벽에 돌려보내야 되는 거거든요. 집안 어른이 알면….

그래서 돌려 보내려고 하니까 성진 어머니가 안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정주읍에 사는 삼촌이 있어요. 거기 가서 아침 밥을 해 달라고 해서 먹이고 차 시간에 맞춰 보내려고 했는데 절대 안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삼촌네 집에 가서 인사를 했어요. 삼촌네 집에 들어가서도 밥을 하는데 도와주겠다 이거예요. 그리고는 이제 어떻게 여기에서 그냥 돌아가느냐는 거예요. 본가집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하고 돌아가야지 그냥 가면 예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 이러고 잡아떼는 거예요, 못 가겠다고. (웃음) 못 간다는 거예요. (웃으심) 자 이거, 그래서 삼촌 어머니더러 증인이 되어 달라고 하고 제발 큰 집에 데려가 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삼촌 어머니가 데리고 가서 우리집에서 일주일 있다가 갔습니다. 그거 보통 여자가 아니라구요.

와서는 시어머니한테 인사하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밥을 지어 가지고 시아버지 될 사람과 시동생 될 사람들의 밥을 다 차려 놓고 그러면서 반대하지 못하게끔 환경을 만드는 거예요. 화해될 때까지 일주일 동안 완전히 묶어 놓고는, 이제는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하는 거예요. '이젠 파혼해도 좋소' 이거지. (웃음) '파혼해도 좋다. 마음대로 하시오' 이거라구요. 자, 일주일 지내면서 어머니 아버지가 가만히 보니까 싹싹하고, 배포가 크고 사리도 짜여 있고 그렇거든. 어머니 아버지 누나 동생 할 것 없이 홀딱반한 것입니다. 작전을 그렇게 한 거예요. 그거 보면 배포가 대단하다구요. 그러니까 전부 자기 주머니에다 넣고 소화하려고 반대까지 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