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집: 천국을 찾아 이루려는 슬픈 아버지와 아들 딸 1959년 05월 1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15 Search Speeches

하나님이 찾고 있" 사람

오늘날 기독교의 수많은 신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심정의 한계성을 넘어 실천노정을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천적인 자녀가 어디 있는 가? 천적인 자녀가 어디 있는 가?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믿음의 명사를 꿈에라도 바라고 세울 수 있어야 되겠고, 어떠한 한 사실을 놓고도 시대성과 역사성을 초월하여 영원에서 영원까지 자유자재로 내것으로 여기어 즐길 수 있고 내것으로 응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해 믿음의 바탕이 되는 길을 세웠다 하는 그런 내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신의(信義)의 법도를 잊어버릴 수 있는 하나의 존재, 실천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실행의 가치보다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그런 경지에서 하늘의 뜻에 사무치게 될 때 하늘은 비로소 '내 아들아, 내 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아들과 딸을 찾지 못한 것이 하늘의 슬픔이요 이 땅 위의 인류의 슬픔입니다. 이 인류를 아들 딸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 하늘의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절대자를 놓고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는 말은 가지고 있으되 하나님을 이렇다 하고 소개할 때 진정으로 감정이 통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감정을 떠난 말이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통하고 감정으로 접할 수 있는 신(神)은 어디에 있을 것인고? 여러분이 신앙노정을 가는 데 있어서 절실한 심정을 가지고 이런 문제에 부딪쳐서 믿음이란 명사와 실천이란 명사를 넘어서서, 아버지에게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세포와 자기 심정이 동하여 아버지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은 필시 그런 외침이 생리적인 상태로 머무를 수 있는 한 존재를 찾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의 인류가 울어야 할 일이 있다 할진대는 인류 전체가 책임하지 못한 것을 놓고 서러워 하며 울어야 할 것입니다. 6천년 동안 하늘을 슬프게 하였던 역적이요 배반자인 우리 선조들을 대해 서러워 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오늘 내 한 자체를 놓고 서러워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적인 관점에서 우리 자신들이 어떠한 한계권내에 헤매 나오지 않았는 가를 생각도 해 보지 못하고 움직이고 있다면, 그러한 우리를 대해 하늘은 '옳구나' 하겠습니까 '슬프구나' 하겠습니까? 그 심정은 4천년을 지나 6천년 역사의 인연을 가한 슬픔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늘이 여러분을 대해 탄식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음을 자인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리고 모심의 생활을 잃어버린 심정에 흐르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슬픈 감정이었습니다. 뭣인지 모르는 슬픈 감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슬픈 감정이 싹트고, 어떠한 의식적인 기준을 세우지 않았는 데도 불구하고 생활적인 분야에 있어서, 주위 환경에서 슬픔이 찾아오는 시간이 있을진대 하늘이 찾아오는 시간인 줄 아십시오. 그러한 시간에 그 슬픔의 실체를 붙들고 눈물로 인연을 맺는 이가 있다면 그는 소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맺어야 할 인간이지만 타락한 인간이 하늘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대할 수 없기 때문에 평면적인 주인공으로 이땅 위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실체 주님되시는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4천년 슬픈 역사노정에서 몰리고 쫓기던 이스라엘민족이 하늘의 슬픈감정을 품으신 예수님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었던들 그 민족은 오늘날 세계 앞에 이름을 드날리는 민족이 됐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민족을 잃어버리고 주권을 잃어버리고 국토를 잃어버리고 유리하는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민족이 되지 않았을 것이에요. 그렇지 않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