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집: 뜻을 중심한 한국과 세계 1980년 10월 16일, 한국 본부교회 Page #226 Search Speeches

기독교가 주장한 막-한 사'관

메시아주의, 기독교사상으로 보게 된다면, 유대교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그 유대교사상을 중심삼고 4천 년 동안 유대 민족으로 하여금 그 고생을 하게 하면서, 여러 민족 앞에 천대를 받게 하고 이방 민족 앞에 수난길을 거치게 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님이 찾고자 한 것이 무엇이냐? 반대하는 모든 민족을 제압하고 승리한 그런 민족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한 것은 뭐냐? 핍박받는 도상에서 어렵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보다 가치 있게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이 바라는 표준적 사랑의 핵점에 적합할 수 있는 하나의 목표를 환경적으로 갖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시대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수난길에 내몰았던 사실을 이스라엘 민족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제사장이나 서기관은 물론이고 일반 유대교 신자들 너나할것없이 확실한 표준을 중심삼고 세상이 아무리 소란하고, 세상이 아무리 변천하고, 세상이 아무리 흘러 가는 역사형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 가운데 깊이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를 원하고 나가면서 상대적 가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겠다는 신념을 갖고 환경을 밀고 나갔더라면,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들을 중심삼고 협조했을 것입니다. 그를 붙들고 사랑의 세계의 형성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느냐? 오늘 기독교면 기독교를 중심삼고 볼 때에, 2천 년 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왔다가 가 가지고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중심삼고 전세계의 종교의 판도를 닦아 놓고 무조건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표준해 놓았지만 그 근거가 어디 있어요? 그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저 막연하다구요.

'예수님을 사랑해라, 하나님을 사랑해라' 하는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 예요? '무슨 사랑인 줄 모르지만 사랑하면 돼?' 하는 이것 가지고는 안통한다구요. 하나님은 질서적 하나님이요, 만유를 창조할 때 원리원칙을 통해서 창조하신 주체자이기 때문에, 혼란적 이고 무질서하고 무목적적 내용의 세계에서는 사랑이라는 글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거예요. 그건 무엇보다도 확실해야 됩니다. 질서 중에 성립돼야 되고, 그 내용에 있어서 확실해야 된다구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기독교가 제창하는 사랑이란 막연해요. 길가에서 거지 앞에 돈 몇 푼 주는 걸 사랑으로 생각하고, 배고플 때 밥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기독교를 세운, 예수를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만유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그 주인으로 세워 가지고 나오면서부터 바랐던 하나의 뜻, 소망은 그런 막연한 것이 아니예요. 확실한 것입니다. '네가 없으면 나는 죽는 거야' 하는 그 이상의 사랑, '너와 나는 공동적인 운명의 결의를 다짐하는 사랑의 주체와 대상으로 영원히 남아져야 돼. 그것이 어떠한 실격자가 아닌 승리자로서 영원히 남아져야 돼' 그럴 수 있는 보장을 갖출 만한 기독교 신앙 터전이 있느냐 할 때, 없다 이거예요. 그 외의 어떤 종교에도 그것이 없다구요. 그런 종교상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이란 명제를 앞에 놓고 생각하게 될 때, 오늘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사랑관은 확실하다 이거예요. 확실하다 이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