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집: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1962년 02월 04일, 한국 이리교회 Page #285 Search Speeches

공의의 법도대로 살아가야 할 나

만일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편에서 쓰러지기를 바라고, 고아와 같이 이 세계 앞에,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3천만 이 민족 가운데 그런 청년 남녀들의 수가 날이 가면 갈수록 불어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탄생될 수 있기를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은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의 절망을 해원시켜 줄 수 있는 청년 남녀들, 해원의 조건을 선포할 수 있는 용맹스런 정의의 종교는 어디 있느냐고 외치며 통곡하고 싶어해야 됩니다. 외치다 보니 힘이 부족하고….

이러한 논법에서 보게 될 때, 동방의 고아와 같이 홀로 자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벌거숭이 삼천리 반도, 너는 누구한테 뜯겼던고! 자리를 잡지못하고 왔다가 방황하는 3천만, 너는 누구한테 이렇게 당하였던고! 자기 부모가 있다면 더운 방에 눕히고 싶은 것이요, 자기 처자가 있다면 역시 그러한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수하를 막론하고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은 천리의 인연이 그렇게 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기 옆에 누운 부모를 굶겨야 하고, 자기 옆에 있는 자식들을 굶겨야 하고, 때로는 자기 사랑하는 아들딸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 처참한 이런 인연을 누가 만들었느냐 이겁니다. 본래 우리 선조들이 잘못한 죄악의 보답으로 그런다면 할 말이 없지만, 할 수 있는 데도 하지 않아서 이런 보응을 받는 다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 이것이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할 과제입니다.

죽어가는 민족 앞에 우리는 죽은 무리가 되지 말아야 됩니다. 헐벗고 있는 이 민족 앞에 헐벗은 무리가 될망정, 몰리고 있는 민족 앞에 몰리는 무리가 될 망정 우리는 죽은 무리가 되어선 안 됩니다. 벗고 있어도 또 줄수 있고 몰리는 자리에서도 구해줄 수 있는 이런 무리여야 됩니다. 이것이 당장 이 민족에게 필요하고 절박한 과제라는 것을 우리 청년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구호가 있다면 `나는 내 것이 아니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새로운 명제를 내세워야 할진데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이 나라는 이 나라의 것이 아닙니다. 더우기 이세계는 이 세계의 것이 아닙니다. 곱게 단장시켜 나보다 더 거룩한 존재 앞으로 내가 끌고 가 보여 주어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여 주는 동시에 자랑해 드려야 할 또 하나의 주인이 있단다면 그 주인 앞에 그러한 책임분담을 해야 할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직시해야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여러분 앞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가야 하고 여러분들도 가야합니다. 가야 할 그 길이 평탄한 길이라면 좋으려니와 평탄한 길이 못됩니다. 가시밭 길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험산준령, 피 흘려야 할 이런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이 길을 단연코 가야 할 때가 왔고, 이 난국을 돌파해야 할 시대가 왔는 데 이 민족은 잠자고 있고, 깊은 몽상에 잠겨 있으니 이제는 어떡해야 되겠느냐? `야, 아무개야 깨라!'라고 부르짖을 때는 지나갔습니다. 집에 불이 붙어 당장 쓰러질 운명에 놓여 있다는 절박감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저들의 머리카락을 잡아채고 발길로 걷어차 가지고 유리문 밖으로 던질 수 있는 이런 절박한 시대가 왔다는 겁니다. 사정 볼때는 지나갔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런 때에 있단 말입니다. 지금 그런 때에 있어요!

선생님은 염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혁명 정부에서도 대공문제에 대해서 염려해 왔지만 선생님은 그런 문제에 더욱더 염려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통일교회에 들어와 보니 3년 기간이라는 혈투전을 전개할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기간은 굶으면서도 가야 되겠고, 떨면서도 가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나서서 외치는 사람도 지극히 사랑하는 부모를 가진 자요, 누구보다도 더 사랑받는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얽매어 살 것이 아니라…. 그들도 민족을 위함이요, 그들도 공의의 법도를 빛내기 위한 것임을 알기에 오늘날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