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집: 하나님과 함께 걸어온 길 1970년 10월 13일, 한국 중앙수련원 Page #188 Search Speeches

수인 번호 596번

일요일은 쉬었다. 모두는 시체인 양 쓰러져 버린다. 선생님은 절대로 자지 않았다. 규칙적인 생활을 계속했다. 선생님도 어떤 때는 너무나 무리해서 병이 난 일이 있었다. 말라리아를 1개월 동안이나 계속 앓았다. 그러나 자기의 책임분담에는 용서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같이 일했다.

선생님은 감옥에서의 수인 번호가 596번이었다. 영계의 조상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선생님과 인연맺게 하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무슨 차입물이 있게 되면 영계의 조상이 나타나서 반을 596번에게 갖다 드리라고 하는 옛날 이야기 같은 일이 있곤 하였다. 통일교회는 이러한 생활권에서부터 시작됐다. 영계는 천사장권이니까, 천사장으로서 그 사명을 하지 못하면 아담의 영광권과 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수십명이 전도되었다. 어떠한 비참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선생님은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였다.

1950년 8월 1일 백 대 이상의 B-29기가 총공격하여 흥남공장을 크게 폭격하였다. 선생님은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아니라 선생님으로부터 직경 12미터 이내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겠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두 선생님 주위에 있도록 일렀었다.

선생님은 그런 중에서 가만히 명상을 하고 있었다. 폭격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금후의 이상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사상이나 이상을 가진 사람이 가치있는 것이다. 이처럼 복귀의 사명을 하는 이러한 사람을 영계에 데리고 가면 하나님에겐 천주적인 손해다.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방비해 주고 싶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매일 감상문을 쓰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쓰지 않았다.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에 있어서는 할 만큼 하고 있었으니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산주의가 좋다고도 쓰지 않았고, 나쁘다고도 쓰지 않았다. 언제나 백지를 냈다. 선생님은 그런 전법을 취해 왔던 것이다. 선생님은 5년 형으로 입감하였다.

연합군이 공격하여 왔을 때 공산당은 수인들을 처분하고 갔다. 바로 선생님 앞 사람까지 전부 죽였다. 어느날 삼베 끈을 모으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직감적으로 최후의 때가 점점 가까왔다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은 정말 심각한 기도를 했다.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그것이 최후의 길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우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 죽였다. 다음 차례가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총공격이 있어서 새벽 2시경부터 도망쳤다. 그때 몇 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평양으로 해서 남한으로 내려와 통일교회를 재출발했던 것이다.

감옥에서의 생활은 아무리 괴롭다고 하더라도 남에게서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절정에 설 수 있는 방책이다. 남들로부터 혜택을 받는 것은 탕감의 길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 설지라도 자기가 할 것은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해냈다고 하는 입장을 넘지 않고서는 완전탕감했다는 입장에 설 수 없다. 천 삼백 가마니를 매일 들어 올렸다. 그러고도 끄덕도 없었다. 무엇에 의해서 극복할 수 있었던가? 그것은 정신력이었다. 이런 체험이 선생님 생애에 있어서 마이너스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다 얘기해 주고 싶고,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 주고 싶지만, 정말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