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집: 아버지와 나 1959년 07월 1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2 Search Speeches

다시 찾아 세워야 할 아버지와 나의 관계

전세계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신랑이라 부르고 있고 자신들은 그 앞에 당당히 나타날 수 있는 신부라고 자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사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편단심의 심정을 지녀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심정은 자기 자신의 심정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시던 그 역사적인 심정과 이 현실을 거쳐 미래까지 거쳐나갈 수 있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지닌 신부가 되어 하늘을 위하여 움직이고 주체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오! 신랑되신 주여!' 하여야만 거기에 하늘이 응해 주시리라 봅니다.

우리는 남기신 말씀은 귀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신 말씀은 귀중히 여기고 있으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사람은 귀중히 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속되었던, 바라고 있던 메시아는 귀중하게 여길 줄 알았으되 말씀의 실체로 나타나신 그분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했던 것이 역사적인 서러움입니다. 말씀을 들어보면 그럴듯한데 인간을 보면 보통 사람하고 같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곡절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우리 자체들의 한스러운 입장을 해명하고 찾아 세워야 할 부자의 인연을 해명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무슨 소망이니, 무슨 천국이니, 무슨 이상세계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없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혈통을 받은 우리, 죄악역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죄악권내에 속하여 생활하면서 그 환경을 넘어설 수 없는 우리, 이러한 우리인데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 이것은 우리가 노력한다 해도 할 수 없기에 심정을 걸어 놓고 믿으라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입니다. 무슨 조건을 걸어놓고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심정을 통해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을 능통하는 것보다도 66권을 통하여 나타내시려던 아버지의 심정, 타락으로 말미암은 원한을 해명하려는 내용 보다도 타락시키지 않고 살고자 하셨던 아버지의 심정, 아버지를 잃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이루려하시는 그 심정, 타락된 인류를 구하여 그렇지 않은 입장에 세우고자 하시는 그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하고 자신은 그 아들딸이 되고 싶다 할진대 이 거리를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죽도록 성경 말씀만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죽도록 내 말씀만 들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3년 공생애노정 동안 많은 말씀을 하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붙들고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실체를 붙들고 염려해 주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심정의 세계에는 차이가 없기에 지극히 선하고 높으신 하나님이지만 그분을 대하여 감히 아버지라 할 수 있다는 것이예요. 부자의 인연에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지!' 하고 붙들게 될 때에 그 아버지가 `네 손은 딴손이다. 네 몸은 딴 몸이다. 네 마음은 딴 마음이다' 하실 수 없다는 거예요. 심정적으로 일체의 입장에 들어간다 할진대 우리는 아버지의 연장체입니다. 연장체요 아버지의 분신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내용과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내용의 귀일점을 어떻게 이루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아가 그 내용이 같은가 다른가가 문제가 아니라 심정의 귀일점을 이루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 할진대 예수님께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하신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공간을 초월합니다. 여기에는 혁명이라는 명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전에 가신 예수님을 오늘의 예수님으로 모실 수 있고 오늘의 나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인연을 무엇으로 맺을 수 있느냐. 말씀만으로 안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관념적인 인식을 갖고는 안 됩니다. 심정으로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