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집: 사랑의 안보 1986년 03월 06일, 한국 리틀엔젤스예술회관 Page #100 Search Speeches

결과적 존재인 인간은 근원적 존재인 하나님과 하나가 돼야

그런데 신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안보를 진정 바란다 할진댄 안보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분이 있느냐 하는 것을 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안보를 주관할 수 있는 주체자가 있다면, 그분은 누구여야겠어요? 오늘 이 시대를 대표한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은 자기 기준에서 모든 것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대의 호흡과 더불어 그 인간이 지나가게 될 때에, 그 후 시대는 다른 주장을 가진 인간이 나오게 되니 변할 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개인으로부터 세계 만민에 이르기까지 안보의 길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절대적인 분이 있어 가지고 그분이 주장하는 뜻과 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진정 하나님이 있느냐? 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누구보다도 고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 누구보다도 수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말하기를, 세계는 어떤 힘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힘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말하고 있어요. 힘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거예요. 광물, 식물, 동물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요.

그러면 힘은 어떻게 생기느냐? 힘이 그냥 생기느냐? 이게 문제예요. 그러면 힘이 먼저냐? 힘이 생기기 위해서 작용이 먼저 있었느냐? 이런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기의 힘이라는 것이 전기의 작용을 통해서 나오느냐, 힘에 의해서 작용이 나오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전기의 힘이라는 것은 플러스와 마이너스 작용에 의해 가지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힘에 앞서 작용이 먼저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작용이 먼저인데, 그 작용이 있기 전에는 무엇이 없었느냐? 이렇게 볼 때,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만으로는 할 수 없다 이겁니다. 작용이 있기 전에 반드시 거기에는 플러스 마이너스라는 극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기준이 있어 가지고 작용을 함으로 말미암아 힘이 생긴다고 보는 거예요. 태양계를 운행하는 것도 각기 혼자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대관계를 맺어 가지고 작용하여 운행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면서 힘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거예요. 힘이 있기 전에 작용이 먼저 있고, 그 작용이 있기 전에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있는 거예요.

오늘 여기 리틀엔젤스 강당에 우리가 모였습니다. 환경에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 모임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이 모임의 주최측이 주체가 되고 여러분은 대상이 되어 관계가 이루어지고, 여기에 작용이 벌어지는 거예요. 여기서 작용함으로 말미암아 힘이 발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작용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양심작용이 있지요?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가려고 하게 되면 양심이 그 어떠한 작용을 함으로 말미암아 힘이 생겨 가지고, 그 힘이 제재를 하게 됩니다. '너 그래서는 안 돼' 하면서 일생 동안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충고를 하는 거예요. 올바르고 선한 길을 가라고 재촉합니다. 양심이 그렇게 작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양심이 그냥 작용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서 내 마음에서부터 주고받아 가지고 작용하느냐? 그게 아니예요. 그 양심의 본체, 즉 우주를 초월한 어떤 주체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체의 의사와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양심이 작용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양심은 무엇을 추구하느냐? 양심이라는 것은 보다 좋은 것을 추구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여기 오실 때도 그렇습니다. '오늘 문총재를 만나게 되면 만나러 올 적보다는 낫겠지' 그러면서 오지, '아이고 괜히 갔더랬어' 하며 손해나기 위해서 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행여나 뭐 좀 플러스될 수 있는 무엇이 있기를 바라면서 온 거예요. 손해나는 작용은 아무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마당에 나가 보더라도,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손해보기 위해서 장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한푼이라도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움직임은 보다 나을 수 있는 이익을 추구하며 활동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보다 귀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높은 데로 안내합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은 모두가 세계에서 제일이 되고 싶은 겁니다. 이제 방금 박총재가 나에 대해서 소개할 때 '아, 문총재 굉장하구만, 훌륭한 분이구만' 그렇게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문총재가 아무리 훌륭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문총재 자신은 더 높은 곳이 있으면 그 자리로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높은 자리, 최고의 높은 한 곳이 아직 남아 있으면 그곳까지 점령하고 싶은 것이 우리 양심의 작용입니다. 그걸 욕심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양심작용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정당한 길을 통해서 하면 환영하는 겁니다. 비법적 행동을 하니까 나쁘다고 하는 것이지, 정당하게 싸워 가지고 나가게 되면 공적으로 환영하는 거라구요.

이렇게 볼 때 선한 길, 나쁜 길은 무어냐? 나쁜 길은 비정상이요, 선한 길은 정상적입니다. 정상적인 길을 따라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그건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양심은 최고의 것을 향해서 달음질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양심이 얼마나 크냐? 여러분, 그걸 생각해 봤어요? 양심이 얼마나 큰가를 말이예요. 예를 들어 말하면, 여기 오신 한 2천여 명 되는 승공유지 여러분들 한 사람 앞에 내가 돈을 1억씩 나누어 주었다고 합시다. 마음의 명령을 따라서 1억씩 나눠 줬다고 합시다. 그래 그걸 다 주고 나면 마음은 '아이고, 이 리틀엔젤스회관에 온 사람들에게만 주지 말고 서울에 1,200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특별히 이 사람들에게만 줄 게 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1,200만 시민에게 줄 수 있으면 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런 거예요. 만약 1,200만을 그렇게 도와주었다고 하자구요. 그런데 또 4천 만이 있다고 하면, 마음은 그 4천 만에게도 도와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한이 없다는 거예요. 한이 없어요. 40억 인류에게 전부 다 그와 같은 선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어느 한 곳에 남아 있는 뭣이 있다 할진대는 그것까지도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크냐 이겁니다. 측량할 수 없어요. 측량할 수 없이 큰 마음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다시 예를 들어 말하면, 이 우주 가운데 제일 높은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우리의 마음이 그 절대자인 하나님을 점령하고 싶다고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마음은 서슴지 않고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제일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러한 마음의 작용은 근본도 없이, 어떤 관계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작용은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통해서 벌어진다고 할진대, 최고의 것을 바라는 양심이 있다고 하면 그 양심의 욕망의 기준을 채울 수 있는 하나의 주체자가 계신다는 거예요. 그 주체자는 말하자면 절대자요, 종교적 술어로 말하면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이다 이거예요.

내가 지금은 그 하나님과 먼 자리에 떨어져 있지만, 어느 한때에 가서는 하나님을 친구로 하고 싶고, 하나님과 같이 살고 싶고, 하나님과 같이 기뻐하고 싶은 그러한 본심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