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집: 종족적 메시아는 예수님의 대신자 1993년 10월 08일, 한국 제주국제연수원 Page #147 Search Speeches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냐

야곱 가정에서 레아를 중심삼고 어디까지 연장했느냐 하면 예수님 가정까지입니다. 예수님 가정의 마리아를 중심삼고 볼 때,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예요?「사가랴입니다.」누구한테 들었어요?「아버님입니다.」그런 말을 하니까 선생님이 기성교회로부터 반대 받는다구요. (웃음) 그런 것을 소문내고 하니까. 그것을 선생님이 6개월 전에 말한 거예요. 그전에는 말하지 않았다구요. 끈질기게 질문하니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대답은 했지만 그렇다고 하는 대답은 한 적이 없습니다. (웃음)

스도!「예.」네가 그런 선전을 했어?「아버님이 말해도 된다고 하셔서 말했습니다.」언제부터?「5월입니다.」때가 차 왔기 때문에, 참부모와 성약시대를 선포했기 때문에 역사는 분명히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이상 확실히 정정해 두지 않으면 지금부터의 후배들은 아주 혼돈하게 되어 큰일난다구요.

지금부터 세계는 과학 문명시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공식을 중심삼고, 공식의 연결 위에 발전하는 것입니다. 수학에서 답을 엉터리로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 내용도 없이 엉터리로 이렇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모든 전후를 밝혀서 확실한 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컴퓨터시대가 되었습니다. 머리 안의 조직도 그렇게 되어 가는데 맹목적인 신앙은 통하지 않는다구요. 그래서 통일교회는 20세기 이후, 50세기 이후에서도 통하는 종교가 된다구요. 그런 것을 알지 못하니까 지금까지 반대한 것입니다.

이거 소생, 장성을 알았지요? (판서하시며) 이것은 사가랴입니다. 사가리아의 부인이 누구예요?「엘리사벳입니다.」세례 요한, 마리아, 예수님, 이것은 바로 이 가정의 연장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볼 경우에는 어느 쪽이 가인이에요? 이것은 가인, 이것은 아벨입니다. 어떻게 해서 마리아가 사가랴와 관계하게끔 되었느냐? 그것이 문제예요. 어떻게 해서?

사가랴는 마리아에게 있어서 어떤 입장이에요? 언니의 남편이라구요. 언니의 남편을 빼앗았는데 그것은 누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 엘리사벳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안내해서 하지 않으면 그런 것은 할 수 없다구요. 엘리사벳은 왜 그러한 것을 했어요? 왜? 자기 마음대로? 기도 가운데 계시라든가, 무슨 체험의 결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한 것을 해야 했느냐 하면 장자권 복귀를 하려면 하나님편의 장녀와 차녀가 하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태어날 길이 없습니다. 엘리사벳은 본처이고, 마리아는 첩과 같다구요. 이렇게 관계하여 낳은 것이 예수님입니다. 그것을 요셉이 마리아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구요. 죽을 자리에서 살린 것은 요셉인데도 불구하고 배 안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라고 하는 것은 말하지 않은 거예요.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하며 말하라고 한 거라구요. 그러나 그것을 말하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친상간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 되지요? 지나가는 다른 남자라면 몰라도 직접 문제가 된다구요. 이것은 두 종족이 걸리니까 크나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문제예요? 그것을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사이에 끼인 예수님은 비참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결국 결혼해서 자녀를 갖고 예수는 사생아의 입장에서 형제로부터 전부 놀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친척으로부터 쫓겨난 적도 있다구요. 의부로 맞이한 요셉으로부터 불신을 받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12세 때 부모와 같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부모가 예수님을 버려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3일 후에 돌아와서 예수님을 찾아갔다구요. 그때 '왜 여기에 있느냐?'고 하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여기에 있는 것을 모르느냐고 한 것입니다. 그 말을 좋게 해석한다구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해서 반발하는 말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3일이나 놓아두고 지금 와서 뭐냐 그러고서 그러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는 반발의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예수님을 놓아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느냐 하면 요셉에게 끌려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거 이해돼요? 그러한 것이 성서에 많이 쓰여 있습니다.

초막절이라고 하는 축제 기간이 다가와도 예수님이 고향에 있으니 형제들이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한 거예요. 형제들조차 비판한 거라구요. 예수님은 그러한 불쌍한 환경 가운데 입장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