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집: 지도자의 갈 길 1971년 08월 17일, 한국 청평수련소 Page #279 Search Speeches

교회책임자가 가져야 할 마음 자세

통일교회가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리원칙적인 노정은 참주인이 되는 노정이요, 참부모가 되는 길입니다. 참부모는 참아들만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귀해야 할 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전부 구해 줄 터전을 넓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참부모의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아들을 맞이해서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왜? 부모의 사랑은 누가 먼저 받아야 되느냐 하면, 맏아들이 먼저 받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맏아들을 사랑했다는 입장에 서지 않고는 다른 자녀들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천리원칙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이가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만 사랑하면 내가 절대로 후퇴 못 합니다. 예수를 사랑하기 전에 나를 먼저 사랑해 주시오. 완성 단계에 가서는 사람의 완성과 동시에 종인 나도 완성해야 되는 것 아니오? 그러니 사람이 완성되는 자리에 나가면 나갈수록 나에게 종으로서 백 퍼센트 완성될 수 있는 사랑을 줘야 되지 않겠소' 하면서 물고 늘어진다는 거예요.

그것을 가려 나가려면 불가피하게 첫번째로 태어난 가인을 동생인 아벨 이상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평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사탄이 불평할 소지가 있겠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자기 동생보다 더 사랑해 주는 데도 '뭐야. 뭐야' 이럴 수 있느냐 말이예요. 형은 부모가 동생만 사랑하면 야단하지만 자기를 더 사랑하는 줄 알게 될 때는 자기도 어머니 아버지와 합동해서 동생을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것이 부모의 소원이 아닙니까? 그러면 동생은 누구보다도 더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형은 부모의 사랑을 받았지만 동생은 그 부모와 형이 합해 가지고 사랑하게 되니 더 큰사랑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받는 위치로 볼 때, 하늘 앞에 중심적 존재가 누구냐 하면 아벨입니다. 아벨적인 자리가 귀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형은 장자로서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만, 동생은 거기에 형의 사랑까지 플러스해서 받으니 형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사랑권내에 있어서는 동생이 낫다는 거예요. 이런 입장에서 사랑의 중심을 찾아 나가려니 아벨의 자리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을 사랑하지 않고는 아벨이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알겠어요, 모르겠어요?「알겠습니다」 똑똑히 알아야 된다구요.

여러분은 동네에서 못사는 사람을 보게 되거나, 밥을 먹고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세가 그래야 돼요. '이 사람이 이렇게 못사는 것은 인류의 조상되는 사람이 잘못하여 타락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의 사명을 갖고 이 동네에 왔으니 내가 이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데, 내가 이 동네에 와서 일년이 지나도록 너희에게 미쳐진 것이 무엇이냐, 아무 혜택도 가해 준 것이 없구나' 하며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을 가져 봤어요? 이것이 원리적인 거라구요.

또 동네 아이들이 못먹고 못입는 것을 보면 가슴 아파해야 됩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이냐? 나 때문에 이렇지. 이 동네가 하늘로 가기 위해서는 부모로 온 나를 중심삼고 발판을 만들지 않고는 가인의 다리를 놓을 수 없다. 이 발판을 거치지 않고는, 부모의 인연을 맺지 않고는 하늘로 갈 수 없다. 나와 그대들과 이 마을은 참인연이 있어서 만났으니 나는 죽든 살든 끝까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밤이나 낮이나, 자나깨나 사무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입장에 있는 지방 책임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입니다.

숟가락을 들 때에는, 그 동네의 밥을 굶는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방문해서 밥을 다 나누어 주고 그들로부터 '제발 나를 그냥 두고 숟가락을 들어 달라'는 권고를 받기 전에는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게 부모라구요. 자식을 가진 부모가 자기 밥이 있으면 혼자 먹을 수 있어요? 부모는 '어서 먹어라. 어서 먹어라' 하면서 자식들에게 나눠 주고 먹여줄 때에, 그 중 철든 자식으로부터 '어머니 아버지, 우리는 이제 됐으니 부디 어머니 아버지 잡수십시오' 하는 말을 듣고서야 그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밥을 먹게 될 때, 그 밥은 소망과 사랑의 마음으로 먹을 수 있는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밥이 슬픈 밥이 아니라 행복의 밥이요, 절망의 밥이 아니라 희망의 밥이요, 부모와 자식이 그 밥을 먹는 그 자리는 끝이 나는 자리가 아니라, 천륜의 인연이 새로이 맺어지고 하늘땅의 인연이 새로이 맺어지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밥은 복된 밥이요. 그 터전은 행복의 터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단계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길가에 놀고 있는 못 입고 못 먹고 뼈만 남아 있는 애들을 보면 자기 아이들과 같이 붙안고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못 하게 되면 아이를 낳아 놓고 책임을 못 하는 부모와 같이, 자기 아이를 어느 유모에게 주거나, 혹은 어떤 동네에 버린 어머니가 자기 아이가 길리우고 있는 집 앞을 지나다가 그 아이를 보게 되면, 그 아이 앞에 얼굴을 못 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이상의 부끄러움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정의 인연입니다. 만일 자기가 낳은 아들딸이 그렇게 말라빠져 있다면 그 아이를 붙들고 뼈가 녹아나고 살이 일그러지도록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복귀역사 노정에 있어서, 부모가 있으되 그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몇천년 동안 유리고객하고, 원수에게 끌려다니면서도 망하지 않고 씨앗으로 오늘까지 남아진 혈족의 인연이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후손을 남기게 하시기 위해 그 종자가 끊어지지 않을 수 있는 자리에 '나'를 세워 주신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마음을 중심삼고 부모의 심정을 체득할 수 있는 자리가 벌어지게 되는 날에는 절대로 밥을 굶게 되지 않습니다. 동네가 굶기 전에는 여러분이 굶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데도 밥을 굶게 되면 그 동네는 전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사람을 보고도 그렇고 소를 보고도 그렇습니다. '이 놈의 소야, 네가 참부모의 채찍을 맞아 가면서 농토를 갈면 얼마나 좋겠느냐? 불쌍한 고아와 같은 신세, 종의 신세, 그 운명을 가릴 수 없는 그런 입장에 있는 네가 불쌍하구나' 하면서 소의 귀를 붙잡고 이마를 맞대고 엉엉 울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쓸 줄 알아야 됩니다.

밭을 바라보고도 그렇고, 나무를 바라보고도 그렇습니다. '너희들, 역사적 한이 있거든 오늘 나를 보고 풀어라. 소원성취의 욕망이 있거든 나에게 말하라, 내가 하늘의 뜻과 인연을 맺어 주겠다'고 해야 됩니다. 뜰을 바라보고…. 산천을 바라보고도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 골짝골짝마다 내가 다 가주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주인이 못가본 깊은 산중에 있는 나무까지 찾아가서 '오늘 내가 너를 찾아 이 산중에 온 것은 너와 같이 산중에 있는 나무들이 외롭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를 대표적으로 찾아왔다' 하면서 동네면 동네, 군이면 군에 있는 산의 나무들을 대표한 입장에 세워 놓고 기도해 주고, 오늘의 기쁨을 길이길이 전승하고 오늘로서 모든 슬픔을 해원하여 후대에는 이런 슬픔을 갖지 말도록 기도해 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위를 바라보면, '너는 뭇 사람들로부터 무슨 소원을 들었느냐? 많은 사람들이 너를 바라보고 원망하고, 너를 바라보고 저주하고, 너를 바라보고 별의별 생각을 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네가 나를 만나 반가와할 수 있는 오늘을 얼마나 고대했느냐?' 하면서 바위가 슬퍼하기 전에 먼저 슬픈 표정을 짓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 심정을 갖고 나가는 여러분이 된다면, 여러분이 가는 길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괴롭게 되려 하면 여러분의 선조가 말려듭니다. 선조들은 종의 종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종인 여러분이 가면 여러분에 앞서 선조들이 수고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가 동원해 가지고 자기들의 후손에게 협조해 주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겠어요, 안 그렇겠어요?

이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부모의 심정으로 천사장을 사랑하고 아담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수난받는 일이 벌어지게 되면 영계에 속한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협조하기 위해서 동원될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 이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의 심정을 가지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맞기 전에 내가 맞고, 너희들이 고통받기 전에 내가 고통을 당하고, 너희들이 수난을 받기 전에 내가 수난을 받겠다. 이 동네를 깨끗하게 못 한 것도 내 책임이요, 이 동네 전체에 천국의 기원을 못 만드는 것도 내 책임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수고하고, 밤에 돌아와서는 그들을 위해 복을 빌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일생을 걸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과 그 마을의 후손들을 걸고 탄식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그런 입장에 선 사람이 그 동네가 조상으로 맞이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요?「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