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집: 인류의 결실 1962년 10월 2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97 Search Speeches

하나님은 최후- 남겨질 종교의 주인

오늘날 기독교가 이단이니 뭣이니 꼬리를 젓고 나왔지만 개인 모가지를 걸려 가지고 지금까지 행세를 하게 된 거예요. 이래 가지고 개인 부정에서부터 가정핍박, 국가핍박, 세계핍박까지 나왔지만 아직까지….

그래서 아무리 된장찌개를 먹더라도 `아, 오늘날 대한민국의 어떠한 사람, 이 나라 주권자 혹은 박정희 장군이 여기 와서 나하고 같이 먹으면 거기에 진수성찬을 벌여 놓은 것보다 더 맛있게 먹는다' 고 해야 된다는 거예요. 더 좋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럴 거 아니예요?

또 오늘날 민주 진영에 있는 하나의 백성, 제일 노동자―아주 제일 진짜노동자예요―이런 노동자 가정에서 뭐 콩 하나 중심삼아 가지고 쫄쫄 빨고, 그렇게 초라한 살림살이를 하더라도 케네디 대통령이 떡들여다보면서 `야, 너를 놓고 못 살겠다' 이러면 백악관보다 나은 거예요, 이게. 안 그렇겠느냐 말이예요. 한 단계 더 높혀서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에게 `오늘 저녁 쌀도 없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렇지만 물이 있지 않나, 물이. 물이라도 한사발 먹자꾸나' (웃음) 이래 가지고 물 한사발 벌커덕벌커덕 먹고 있다면 어느 것이 행복한 사람이예요? 나는 너 놔두고는 못 살겠다 하는 사람이예요. 세계에서 최고의 행복한 자리는 물 놓고 나누는 그러한 자리입니다. 알겠어요? 「예」

도인들이 제일 도둑놈 심보가 많아요. 도둑놈 심보가 많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놈의 것을 좀 도둑질하겠다는 거예요. 도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게 오시옵소서. 당신만 오시면 됩니다' 이거예요. (웃음) 그게 도인들의 배짱이다 이겁니다. 그거 나쁘지 않다는 겁니다. 또 그걸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투기자, 투기업자예요. 최고의 모험가라구요, 모험가. 인간이 뭐 아무리 투기 사업이 어떻고 모험가라고 해도 하나님을 당하지 못하는 거예요. 참 그런 멋진 부분이 많거든요? 요건 그저 안고 앉아 귀여운 점도 있지요. 그렇다고 `아이고, 우리 하나님 왜 이렇게 만들었어…'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또 귀한 점도 있다는 말이예요. 있지만서도 멋진 투기심이 많아요. 그런 하나님한테 `어떻게 하겠소? 나 형편이 이렇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없으면 안 됩니다' 할 때 하나님이 `오냐' 할 수만 있게 만들어 놓는다면 그 사람은 최고의 승리자예요. `네가 죽는 데는 내가 보호해 주고, 네가 싸우는 데는 내가 싸워 주고, 네가 사는 데는 내가 같이 살겠다. 네가 울면 내가 울고 네가 처량할 때는 나도 처량한 자리에 같이 가겠다. 나는 너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 할 수 있는 , 보리밥을 먹고 된장찌게를 못 먹어도 물을 마시겠다고 할 수 있는 환경에 살겠다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어도 오늘날 세상은 이 꼴이 안 됐다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돼요.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지방에 나가 고생합니다. 나는 `아버지여, 원칙적인 기준을 헤아려 볼 때 감사하옵니다. 이런 자리에서 당신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려 줄 수 있는 통일의 아들딸들이 많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는 거예요. 좋은 자리에서 배를 치고 트림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하나님을 부르며 눈물 흘리는 그 자리가 아버지를 꽁꽁 결박하는 자리입니다. 아버지의 몸뚱이만 결박하는 자리가 아니라 죽어서 그 자리를 갈래야 갈 수 없는 , 지나갈 수 없는 , 심정까지 결박할 수 있는 자리가 그런 자리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끝날에 도인의 갈 길은 7년 대환난이 온다는 것을 몇천 년 전부터 예고해 놓고….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7년 대환난이 휩쓸어 오나니 여기에는 죽음의 경계선에서 앞치락뒤치락해야 할,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생사의 결단을 지어야 할 고비가 많다는 것을 우리에게 예고하였나니 그 예고는 왜….

하나님은 무한히 우신 하나님이예요. 그걸 알아야 돼요. 분하고 통곡에 사무친 하나님이예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영광의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이제 그 하나님은 가면의 하나님이예요. 우리가 믿는, 우리를 이끌어 나온 역사적인 하나님은 슬픔의 하나님이요 고통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배웠다는 거예요. '아버지!' 할 때에는 가슴이 저려 오고, 그런 생각을 할 때 복통이 앞 길을 가로막는다는 겁니다. 눈물이 눈시울을 적셔 앞을 막는 이런 처량한 길을 찾아온 하나님예요. 그러면서 어떠한 자리에서…. 이 지구성이라는 이 별, 이 땅에는 하나님이 발붙일 한 구석도 없어요. 그걸 알아야 돼요. 여러분이 우거하고 아들딸을 낳아 흥흥하고 `좋구나, 오늘 추우니 불을 더 때라! 이불을 덮고 뭐 어떻고' 하는 그러한 자리는 하나님이 같이할 자리가 못 돼요!

내 집이 그러하고 내 몸이 그러하고 내 사회가 그러하고 내 국가가 그러하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러하고 천지가 그러하거늘, 하나님은 제일 불쌍한 하나님예요. 이것들을 이렇게 내버려두고 자기만 영원히 갈라져 살게끔 본래의 창조원리는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너와 내가 굶어도 같이 굶고, 추워도 같이 춥고, 기뻐도 같이 기뻐해야 할 내용을 갖고 지었다는 인간들이 이렇게 사는 걸 볼 때, 이렇게 사는 것은 인간도 잘못했지만 그 원인은 원수에게…. 이래서 심판은 원수 하나 잡자는 것입니다, 원수. 사람을 잡자는 것이 아니예요.

내가 얼마나 원수 앞에 시달렸느냐? 원수 앞에 얼마나 피를 빼앗꼈느냐? 원수 앞에 얼마나 억울했느냐? 얼마나 통곡했느냐? 내 살에는 원수의 채찍 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내 등에는 원수의 창 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내 가슴에는 원수의 화살 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찾아 오나니, 심정의 도리를 세워야 할 하나님은 최후에 남겨질 종교의 주인이예요.

천주의 이념적인 기준이 심령의 세계를 세워 놓아야 할 그런 이념적인 중심이 오게 되면 그분은 누구부터 찾느냐 하면 불쌍한 자부터 찾는 것입니다. `당신을 찾기 위해 밤잠을 헤아리지 않고 손이 찢어지든, 다리가 찢어지든, 욕을 먹든, 몸이야 어디에 가 처박혀 죽든 난 모르겠습니다. 죽을 때 당신앞에 찾지 못하면, 내 인생의 도리를 다하여, 충성을 다하여, 찾지 못하거든 아버지라는 것을 유언하고라도 죽겠다고 할 수 있는 , 허덕이는 무리를 남기기 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