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집: 섭리사적 정상의 가치 1988년 01월 31일, 한국 본부교회 Page #306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섭리방향은 직선

이렇게 보면 나중에 종교권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문화의 배경을 따라서 하나님이 종교를 통해 수습해 나왔지만 가야 할 종교의 길은 최후에는 하나예요. 하나입니다. 동서남북으로 쭉 올라오던 네 종교가 나중에 산정에서 만난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 네 종교가 나는 동이고, 너는 서고, 너는 남이고, 너는 북이다 하는 그 위치를 아느냐? 모릅니다. 알면 좋겠는데 모르기 때문에 그 종교권을 중심삼고도 투쟁이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종교권을 중심삼고 투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또, 하나의 교파를 중심삼고 볼 때에 교파 내의 지도자들 중에는 흑인이 있고, 백인이 있고, 황인이 있습니다. 문화배경이 각각 다름에 따라가지고 집결된 환경을 갖고 있어요.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기독교면 기독교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백인들의 기독교, 흑인들의 기독교, 황인들의 기독교가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하나될 수 있겠느냐? 알면 하나될 수 있는데 몰라요.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니까 하나의 교파내에서도 투쟁시대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타락권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타락권에도 그와 같은 투쟁이 연결됩니다. 섭리사적인 기준에서 시대가 가까워 오면 가까워 올수록, 끝날이 되면 될수록 종교들이 여기에 부딪치고, 종교권에서 하나의 종교를 중심삼고 교단이면 교단끼리 부딪치는 놀음을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교단을 형성하고 있는 근본 요인은 개인들이기 때문에 그 개인들이 살고 있는 가정에서도 종교문제로 부딪치는 놀음이 벌어집니다. 그것이 필연적 귀결로서 봉착하지 않을 수 없게끔 역사시대는 혼란시대를 맞이해야 된다는 결론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방향은 어떠하냐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의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의 원칙적 기준을 중심삼고 지그자그로 꾸불꾸불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섭리라는 것은 직선입니다. 직선으로 출발과 과정을 거쳐 가지고 목적지까지 가더라도 그 방향은 변함없는 방향으로 거쳐가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하나님의 섭리관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반드시 모든 종교의 도주들이 다시 나타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슨 미륵불이 온다든가 유교에서는 진인이 온다든가 그러고, 기독교는 재림주가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나타나서 뭘할 것이냐? 싸우는 환경을 수습해서 하나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결정 못 하는 날에는, 제아무리 세계적 종단이라 하더라도, 그 종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섭리의 주류 방향과 일치되지 않게 될 때에는 악마의 도구가 되기 쉽다는 거예요. 이게 무서운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뜻을 펴 오는 데 있어서 국가편성시대까지는 국가관이 절대 필요했지만 세계편성시대를 향하여 넘어가게 될 때에 국가적 관을 가지고 세계적 관을 부정하게 되면 그건 사탄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원칙은 개인적 섭리시대에서 가정적 섭리시대로 넘어가야 할 때에 개인적 섭리의 뜻을 따라 나온 신앙관념, 종교생활을 절대시하고 일방통행해 가다가는 가정적 섭리시대 앞에 있어서 원수가 된다, 안 된다? 어떤 거예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반항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세계를 바라볼 때에 종교를 모르는 외적 세상에 있어서도 세계시대가 오면 올수록 그 세계시대를 대할 수 있는 나라가 있으면 그 나라 자체에 있어서도 안팎이 싸우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도, 섭리사의 주류에 서지 못한 대한민국도 여당 야당이 싸우고 있습니다. 여당 야당이 왜 나와야 되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여당이 가는 길이 다르고, 야당이 가는 길이 달라야 돼요? 그것이 본연의 세계의 방향과 일치될 수 있는 여야의 길이예요? 아닙니다. 제멋대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가 가지고 어디로 갈 것이냐? 악마가 지도한다면 악마는 본연의 세계와는 정반대의 길, 반대의 길로 끌고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당 야당이 가야 할 보편적이고 타당한 길은 어떤 길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당을 위해 사는 여당요원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사는 여당요원들이 되어야 됩니다. 나라를 위한 정당이 되어야지, 정당을 위한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일단 여당이 설정되게 되면 야당은 여당을 반대하는 야당이 아니예요. 여당을 보호하는 야당이 되어야 합니다. 왜? 여당이 뼈와 같은 자리에 있다면 야당은 살과 같은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 둘이 합해야 돼요.

이것이 밑에서는 갈라져 있지만 정상에 가게 되면 하나되어야 됩니다. 안 그래요? 산맥이 많은 데서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자랑할 수 있는 미를 갖추었고, 천하에 아무도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고개를 넘고 넘고 넘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산은 어떻게 돼요? 자기를 부정해야 됩니다. 그래야 제일 높은 꼭대기에 나무 하나도 없고 울퉁불퉁 나온 돌멩이로 돼 있다 하더라도, 정상이 숲이 아니라 뾰족한 칼날 같더라도 그 산꼭대기에 서서 하루를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세상을 알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