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집: 좋은 사람들 1970년 09월 1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25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고통을 해소해 "리려면

그러면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종교는 좋은 사람을 추구해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추구해 가지고는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이냐면 좋은 사회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갑이라는 사회와 을이라는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사회, 즉 과거·현재·미래를 통해서 형성되어 있는 모든 사회가 좋아지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형성되어 있는 사회가 좋아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수고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고통을 받아야 되느냐? 좋지 않은 사회를 분립시켜 가지고 아무런 관계 없는 입장에 서게 되면 하나님이 고통을 받을 까닭이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이 좋지 않은 사회를 대하지 않을 수 없는 본래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모든 좋지 못한 사회를 대해 나오시는 하나님이기에 고통을 받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소망의 나라를 추구해 나가야 될 입장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더 좋은 국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러기에는 미급할 수밖에 없는 국가권을 대하시기에 하나님이 더 슬퍼하실 수밖에 없고 더 고통받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받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메워 드릴 것이냐? 그것은 어떠한 개인이 열심히 기도를 하여 위로해 드린다고 해서 메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입장에서 소망의 천국을 이끌고 갈 수 있는 하나의 좋은 나라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메워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계를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소망하는 세계의 기준 앞에 현재의 세계가 미급하여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큰 고통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느때에 그 고통을 해소하실 수 있을 것이냐? 그것은 한 개인이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해서 하나님의 고통이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쁘실 수 있는 세계를 형성해야만 그 고통이 해소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선을 추구해 나가고, 혹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내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한 사람의 기준과 차이가 있으면 그 차이로 말미암은 슬픔을 해결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을 통하여서 하나의 새로운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에 일치되지 못하는 현재의 이 사회, 그 뜻이 지향하는 선한 세계에 일치되지 못하고 차이가 큰 우리 개인과 가정으로서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메워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수의 무리라도 그러한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의 상징적인 형상을 세울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않고서는 제2의 소원, 간접적인 소원도 이룰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모두 자기를 중심삼고 선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주변의 환경을 전부다 망각해 버리고 오직 나 자체만을 중심삼고, 동기도 나요, 결과도 나라고 하며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내가 선한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세계에 필요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보다도 고심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도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개체로 보면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당당히 나설 수 있었지만 소망의 국가를 찾아 나오신 하나님 앞에서는, 다시 찾으시려는 소망의 나라인 이스라엘과 현재의 이스라엘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서러움과 서글픔을 느낀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서글픔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슬픔을 누가 풀어 드릴 것이냐? 예수님 개인만으로는 그 슬픔을 풀어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그 터전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국가의 형태라도 갖춘 기준이 나오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으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미래에 대한 사명을 절감하면 절감할수록 가중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좋은 일을 해야 되겠다, 좋은 행동을 해야 되겠다, 혹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이냐? 그 목적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개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좋은 가정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개인이 되었더라도 좋은 가정의 기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만으로는 가정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좋은 가정을 형성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려면 횡적인 관계가 문제 되는 것입니다. 좋은 가정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좋은 사회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좋은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수다한 좋은 가정을 연결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가정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를 두고 볼 때 국가를 형성하는 데도 마찬가지이고, 한 국가를 두고 볼 때 세계를 형성하는 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선을 추구해 가는 신앙자의 길에 있어서는 자기를 중심삼고 사는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내가 주체적인 입장에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을 수습하기 위한 주체이지 목적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움직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절대 순응하고, 절대 복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한, 절대 희생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자 앞에서의 나 자체는 무의 입장에서 따라가야 되고, 절대자를 주체시하여 대상의 입장에서 그 절대자와 화합할 수 있는 모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노정인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개인 개인을 횡적으로 연결시켜 가지고 더 높은 차원의 가치를 가려 나가야 할 것이 복귀도상에 처한 우리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서 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