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집: 예수의 최후와 우리의 각오 1965년 01월 31일, 일본 동경교회 Page #20 Search Speeches

지도자의 심정

이것은 섭리상으로 본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앙생활 역사의 일단이지만, 이 신앙생활을 인도하시고 명령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개인, 자기 가정, 자기 민족을 그러한 고통스러운 입장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쓰라린 속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하면, 역사 위에 나타나 있는 사실보다도 역사를 움직이시고 사람의 배후에서 섭리의 목적을 성취하게 하기 위하여 명령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내정, 곧 그 속사정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심정을 모르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모세가 일치하여 가나안을 바라고 그리워하는 심정, 최후까지 싸워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모세의 마음과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다만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 마음만 가지고 모세의 뒤를 좇아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고향에 가는 일만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고통과 그 이상의 쓰라림이 있으면 모세에 대하여 반항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신하는 입장에 섰던 것이다.

그러한 60만 이상의 군중을 이끌고 가는 하나님이나 모세의 내적 걱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생사를 결하고 가나안 땅에 돌아가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상하 일체, 혹은 내와 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모세와 하나 되어 전진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의 반 가량이 사탄편을 지지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머지 반의 백성만이라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민족의 5분의 1, 혹은 10분의 1을 희생시키더라도 모세와 일치시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목적을 갖게 하여 가나안 땅에 복귀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거기서 민족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섭리는 완수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했다. 자기의 생활 조건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민족을 생각할 여지도, 하나님을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자기들의 지도자의 마음이 대체 어떤가 하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했지만 그것을 아는 자가 없었다.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과 생활이 안정만을 바라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급에서의 생활 이하의 상태에 부딪치자 불평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일 거기서 이스라엘 민족이 돌아가야 할 미래의 고향 가나안을 버리고 애급으로 돌아간다면, 아무리 모세의 지도하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라 할지라도 모세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이 되고 하나님과도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모세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그때에 그러한 민족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민족으로부터 ‘먹을 것이 없다, 마실 것이 없다, 입을 것이 없다, 살 곳이 없다’는 불평을 듣는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쓰라림, 지도자로서의 고통은 명령하신 하나님의 고통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모세가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와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이중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실 수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는 배반하는 것에 대해 괴로와하지 않으실 수 없었고, 모세에 대해서는 불쌍하고 가여운 생각에 괴로운 심정이셨던 것이다. 그러한 불신앙의 경지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누가 ‘하나님이여! 이 민족을 벌하소서’했다면 정말로 벌하고 싶은 경지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셨던가.

그러나 모세는 그럴 때마다 `당신이 간난신고를 거쳐 애급 땅으로부터 이끌어 내신 선민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수많은 민족이 아벨을 저주한 것은 사탄에게 좋은 조건이 아닙니까? ' 하며 아픈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했다. 모세의 그러한 심정이 뒷날 이스라엘의 지도자, 혹은 족장과 수많은 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민족을 바라보는 모세의 심정은 차라리 자신이 죽어 버리는 편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선조들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역사적인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으로서 자기의 자손들과도 영원히 함께 계시고 자기의 씨족들과도 영원히 함께 계실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모세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대로 둘 수도 없고 팽개칠 수도 없었다. 그러한 지도자의 입장에 서 있던 모세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의 기도를 하였다. 민족과 일체가 되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제단의 장(場)으로서 타락세계와 분별하여 하나의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나안 땅을 민족적인 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모세 앞에 모두 타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최후에는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가진 모세마저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모세를 세워 이끌어 온 역사노정이 그렇게 끝나 버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나타난 역사만이 아니라 그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비참한 심정과, 그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책임을 진 지도자의 심정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모세와 함께 죽음의 경지를 넘으면서 원수들 밑에서 온갖 괴로움을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을 대표하여 싸워 주는 모세와 그 모세를 격려하고 그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해 마지않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서로 충돌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대하여 ‘우리들에겐 하나님도 없다, 우리들에겐 지도자도 없다’고 하며 우상을 만들어 춤추며 난동을 벌였다. 2천 4백년 동안의 수고의 역사가 그 거칠어 빠진 황야에서 그러한 결말을 맺고 말았으니, 그 이상의 비참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