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집: 섭리의 방향 1963년 08월 1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08 Search Speeches

사상적인 기반이 "을수록 세계적인 희생을 동반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소원성취하는 데는 반드시 사정이 있어야 된다구요. 사정을 통하려니 횡적 관계가 필요하다 이거예요. 나만 가지고 안 되니 여기에 아담 해와가 필요한 것이요, 천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뭘할 것이냐? 기쁠수 있는 세계를 이루어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 세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두고 두고 흘러갈 수 있고 영원히 두고 두고 기뻐할 수 있는 심정의 세계, 내적으로 느낀 감정적인 그 세계를 사모해야 될 생활적인 무대를 넘어 소원성취한 상대적인 목적의 세계에서 생활하게 될 때, 여기에서 3단계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만족과 행복은 3단계를 넘어서야 돼요. 보라구요. 내 마음이 기뻐하려면 몸을 통해서 상대를 갖추고 난 후에야 기뻐하게 됩니다. 천지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천지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창조하게 되는 데에는 심정적인 관이 없는 것이 아니요, 내재적인 사정의 관이 없는 것이 아니요, 내재적인 소원의 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실체를 거쳐 가지고 사정적인 세계를 다리 놓아 소원적인 세계를 거쳐 목적을 달성한 후에 심정·사정·소원이 일치한 3세계의 감정을 일시에 품에 안을 수 있고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세계를 하나님 이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심정세계만 추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 혼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피조세계를 지었느냐? 바로 이걸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심정·사정·소원이 일치한 그 기쁨을 일시에 느낄 수 있는 그 세계를 위하여 천지창조를 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된다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으면 창조주의 심정이 있고, 심정이 있으면 사정이 있고, 사정이 있다면 소원이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타락한 역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타락한 우리 인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지 하나님의 사정이 어떤지 하나님의 소원이 어떤지 몰라요, 몰라. 몰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심정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 이 사정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 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섭리다 이겁니다. 지금까지의 구원섭리다 이거예요. 다시 말하면 재창조역사다 이거예요. 아마 이것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말을 처음 듣더라도, 여러분이 듣기는 처음 듣지만 그런 세계가 있었다면 벌써 있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이 거리는 먼 거리인데 나의 생애는 불과 백 년 미만입니다. 영원한 역사선 위에 일생이 백 년도 채 못 되는 것을 볼 때, 한 일 밀리미터나 될까요? 일 밀리미터도 못 돼요. 일 밀리미터도 못 돼요.

그런데 요것들이, 고것들이, 요것도 제멋대로 살겠다고 이 우주적인 방향의 의로운 큰 흐름 앞에 딱 꺼꿀잡이가 되어 가지고 우주를 향해 대항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배반하는 거예요. 암만 콩튀듯 날뛰어도, 무슨 무슨 주의, 무슨 사상, 무슨 이상을 부르짖었댔자 그건 타당하지 않아요. 거꾸러진다는 것입니다.

이 선이 돌아갈 수 있는 커브는 아직까지 시작되지 않았어요. (판서하신 것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심) 그렇지만 요 선이 돌아갈 커브는 많아요. 뒤넘이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동시성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범위가 커진다구요. 그러면서 하나로 수습되는 거예요.

작은 놈들은 말이예요, 조그마한 놈들은 양심이 마음을 중심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뒤넘이치느냐 말입니다. 하루에도 또 하고 또 하고 뒤넘이친다 이거예요. 이 운동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점점 커 가면 커 갈수록 여기에 감겨 넘어가는 희생자가 많은 것을 알라!' 이것이 지금까지 투쟁사의 배후입니다. 제1차 전쟁과 제2차 전쟁을 중심삼아 가지고 각 민족의 역사 배후에 나타난 투쟁사의 희생의 제물들이예요. 그 주의사상의 발판이 크면 클수록, 그 사회의 사상적인 기반이 넓으면 넓을수록 거기에 동반한 희생이 세계적인 희생을 동반한다 이겁니다. 작으면 작을수록 거기에 비례해 희생됩니다. 개인이 걸었으면 개인적인 희생이 벌어져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역사적인 사조가 이렇게 크나큰 주의로 갈라져서 뒤넘이 칠 수 있는 희생의 자장이라고 할까, 이러한 환경이 몰아치고 있으니 여기에서 뒤넘이 쳐 가지고 내가 돌아가 꼬꾸라지는 날에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흘러서 새로운 역사적인 제1방향의 기점을 밟고 나서는 사람은 그래도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역사는….

그러니 철썩같아요. 이 원칙은 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 선조가 나기 전부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부터 있는 거예요. 천지창조 시작 때부터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 없어진 적이 없어요. 존재하는 그 실존의 가치관이 시작될 때부터 그 가치관이 아직까지 결정되지 않은 지금 이때가 고비가 되는 기간입니다. 필요로 하는 기간으로 존재한다 말이예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이냐? 이런 문제를 볼 때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오늘날 정치적 정책이 뭐예요? 주권자의 소원과 사정과 심정을 통하는 것입니다. 딴 게 아니라구요.

심정에서 반응되면 사정을 통하여 가지고 사정적으로 소원성취하여 심정, 사정, 소원이 일치되는 기쁨과 행복을 갖고 '아, 과연 나는 지난날이 전부가 좋았다. 오, 과연 태초 천지창조는 선한 창조였고, 과연 하나님이 창조하던 과거가 전부 다 좋았다'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냐? 이 3요건이 합의점에 부딪쳐 가지고 성취될 그 순간에 전체 세계는 전부 다 경계 기준이 된다구요. 3점 이상을 넘어가야 영원히 돌아가는 거예요.

직선이라는 것은 1점이지만 3점에서부터 곡선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곡선은 반드시 3점에서부터 벌어집니다. 이 천지창조는 3점의 조화에서부터 벌어져 나간다 이거예요. 거기서부터 집요한, 미묘한 가치가 벌어져 나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