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민이란 하나님께 '붙이기 위한 국가적 터전을 마련하" 것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개인을 접붙이려면 개인을 접붙이는 운동을 해야 되고, 가정을 접붙이려면 가정을 접붙이는 운동을 해야 되며, 국가를 접붙이려면 국가를 접붙이는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접붙이려면 접목에 잘 붙을 수 있게끔 훈련을 시켜 가지고 갖다가 접붙여야 되는데, 이것을 한번에 접붙여야 될 입장에 있다면 얼마나 어렵겠나 생각해 보세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주류사상을 따라 이 뜻을 세우기 위한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 형태를 하나님도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주도적인, 주류를 대표해서 하나님이 붙이는 데에 붙을 수 있게 준비를 하고 그 터전으로 마련한 것이 선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올 때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런 선민의 사명이 있었지만 책임을 못함으로써, 접을 못 붙였기 때문에, 그 밭에서 접붙일 수 없게 되었기에 세계를 향해 제2차적인 준비를 한 것이 영적 이스라엘권인 기독교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예수님이 올 때에 예수를 갖다 붙이기 위한 틀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접붙여야 할 본래의 나무떨기가 구새가 먹고 벌레가 먹어, 하나님이 볼 때 과연 완전한 틀거리를 다할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었더냐 이거예요. 접붙일 수 있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기준이 이루어지지 않고, 전부 다 썩어 버린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할수없이 다시 터전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접을 붙이지 못하고 감으로 말미암아 다시 접붙일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한 것이 기독교다 이겁니다. 그러면 지금 끝날이 되어 들어오는데, 이 기독교에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접붙일 수 있는 개인과 가정과 국가가 있느냐는 거예요. 지금 보게 되면 전세계 기독교는 몰락 단계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걸 볼때, 과연 주님이 이와 같이 접붙이기 위해서 온다면, 접붙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 진정한 의미의 가정, 진정한 의미의 씨족, 진정한 의미의 나라가 있느냐 할 때, 우리는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