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집: 한을 남긴 책임분담 1972년 10월 2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26 Search Speeches

타락함으로 말미"아 남아진 한스러운 책임분담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 국가 민족을 중심삼은 탕감복귀의 사명을 완결지어서 국가 민족을 대신하여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 있는 무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있느냐?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 이 민족적 책임분담을 완수하기 위하여 나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개인적인 탕감을 거쳐 가지고, 개인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정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국가적인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가 가르쳐 주는 순차적인 노정이 아니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연 나 자신이 민족적 책임분담을 완수한 자리에 섰느냐 할 때, 여러분은 '그렇다'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있느냐? 여러분이 원리를 배워서 알다시피 개인의 십자가의 노정, 즉 개인이 탕감복귀 완성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제물 되는 것이 7년노정이라면, 그 7년노정에 승리한 자리, 즉 책임분담을 완수한 자리에 서서 또다시 가정의 책임분담을 완수하기 위해서 희생의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 책임분담 완수보다 배가의 힘이 드는 것입니다.

내 하나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하나의 남자 하나의 여자가 자녀를 거느린 하나의 가정을 중심삼고 책임분담을 완수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인이 책임분담을 완수하는 것보다 몇십 배 몇백 배 힘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개인이 책임분담 완수한 터전 위에 가정 책임분담을 추구하고, 가정 책임분담을 완수한 터전 위에 씨족 책임분담을, 씨족 책임분담을 완수한 터전 위에 민족 책임분담을, 민족 책임분담을 완수한 터전 위에 국가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할 것이 원리가 가르쳐 주는 전진적인 발전 노정이라고 할진대는 과연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우냐?얼마나 어려우냐 이것입니다. 그런 것을 직시한 예수님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당초에 죽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갈 수 없다 하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싸우는 그 삼팔선을 타개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역사가 동원되었지만 그것을 해결한 그 누가 있었느냐?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승리했노라'고 만천하 앞에 제시한 사람이 있었느냐?없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절망으로 태어났고 절망으로 살고 절망으로 죽어가는 것이 인생인데, '이 절망의 함정을 초월해서 나만은 승리하겠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나는 하늘이 제시한 책임분담의 요인을 전부 다 탕감해 버렸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봤느냐? 일시에는 그럴 수 있어요. 일시에는.

석가 같은 분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홀로 천상천하에 제일 높다고 할 수 있는 그 자리라는 것은 일시 한 때에는 있을 수 있지만 장구하게도 있을 수 있느냐?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개인이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도 가정적 탕감복귀노정을 중심삼은 책임완수 노정에 떨어져 내려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개인을 붙들고는 근근히 끌고 갈 수 있는 길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가정적 책임완수 노정이 인생이 가야 할 길 앞에는 완전히 막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앞에 놓고는 아무리 유아독존이라고 말했던 석가도 떨어져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책임완수한 그 기준에 섰다면 그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거기서 승리의 권한을 자랑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가정이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도 그 가정은 또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종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높은 권위의 자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내려가야 됩니다. 희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종족이 책임분담을 완수했더라도 그 종족은 민족을 대해서 또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민족이 책임분담을 완수했다면 거기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향하여 또 내려가야 되는 것이 아니냐, 세계는 천주를 향하여, 천주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여 굴복해 가지고 희생의 대가를 완전히 치르지 않고는 책임분담 완수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가 확실히 가르쳐 주는 노정인 것을 알게 될 때, 책임분담의 노정을 가야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인생길에 남겨진 한스러운 길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많은 책임분담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있어서 아담 해와가 망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가인과 아벨이 망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노아 가정이 또다시 꺼꾸러진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아브라함이 수난길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모세가 광야에서 쓰러지게 된 것도 책임분담 때문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이상적인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성전 건축을 못한 것도 책임분담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역시 그랬고, 이스라엘 민족도 역시 그랬고, 유대교도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한을 남긴 것도 결국은 책임분담 때문이 아니었더냐?하나님이 한을 품고 오는 것도 책임분담을 완수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냐?이렇게 볼 때 한많은 책임분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이 탕감복귀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탕감복귀를 해서는 뭘하느냐?탕감복귀해 가지고는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자리까지밖에 넘어갈 수 없습니다. 탕감복귀로 수습할 수 있는 그 한계점을 타락전 아담 해와 그 이상의 자리는 못 올라간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결국 탕감복귀라는 것은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지, 타락이 없었으면 탕감복귀라는 말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탕감해가지고 복귀한다는 그 복귀의 한계점이 어디냐?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자리, 그 이상은 못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