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집: 섭리의 십자로 1972년 07월 0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03 Search Speeches

주체적인 사'은 '심을 잃고 취할 수 있" 것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우주를 대표한 아들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밥을 먹더라도, 혼자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이더냐? 안 보여요. 그것을 어떻게 실감하느냐? 이 우주의 만물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그려 놓은 거예요. 화폭과 마찬가지예요. 그것을 바라보고 취해 가지고 좋아하고…. 그렇지 않아요?

자기가 그린 작품을 중심삼아 가지고 밤이나 낮이나 취해 가지고 바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그린 화가가 그걸 보고 기분 나빠하겠어요? '이 녀석이 울긴 왜 울어? 그래요? 그런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와서 안방에다 모시고 '왜 그랬소' 하면서, 사연을 얘기하게 할 것이 아니예요? '아이고 좋아, 아이고 그리워, 아이고 같이 있고 싶어' 한다고 해서 미쳤다고 하겠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몰라도, 하나님이 만 우주에 꽉차 있는 편재성을 지식적인 주체로 계시는 것보다도 사랑으로 계시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사랑의 동감권을 각 분야에서, 민족을 넘고 세계를 통해서 체휼할 수 있느냐?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재인식되는 거라구요. 재발견되는 거라구요.

이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자리에 내가 서 있다 하는 신념을 갖고 나올 때, 그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주고 나서 '야, 너에게 줬다' 이렇게 머리에 기억해 가지고 '이만큼 주었으니…' 이런 장삿속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백만큼 줬으니 너는 나에게 백 하나만큼 줘야 한다' 이렇게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면서 부끄러워하는 거라구요. 주고 나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해주었더라도 '이 땅에 수많은 왕자, 왕녀들이 왔다 갔던 것이 아니냐? 내 아들이 그 왕자들보다 못하더냐? 내 딸이 그 왕녀들보다 못하더냐? 이러면서 그 이상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해준 옷을 생각하게 될 때에,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세계의 어떠한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더 좋은 옷을 해주기 위해서 눈물이 앞선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런 부모에게는 아들이 아무리 파고들어가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비로소 취하는 사랑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끝이 있으면 취하지 않는 거라구요. 한 바퀴를 돌면 취해지지 않습니다. 몇바퀴를 돌아갈 때에 중심을 잃어버리며 취해지는 거라구요. 취하는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고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랑, 즉 주고서 내가 주었다고 수첩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 나서 받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주고 나서 상대가 감사하는 데 있어서 받지 않아도 받은 것보다 더 좋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는 사람도 미안해하고, 받는 사람도 미안해하게 될 때, 그 사랑만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 기분이다' 해 놓고, 그 다음에는 '없어' 이러면 안 됩니다. 둘이 주고받고 나서도 그 사랑은 없어지지 않아야 돼요. 이런 이상적인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나서 '아, 당신이 나보다 더 사랑해 주시오' 한다면, 그것은 파괴될 수 있는 사랑이라구요. 사랑하고도 '내가 아직도 부족합니다. 내가 아직까지 미급합니다' 이렇게 사랑한 것이 한 터전이 되어 가지고, 그것이 장본이 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알곡이 거둬질 수 있는, 밑천이 남아질 수 있는 사랑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상적인 가정이 되어 나라를 찾고 다 찾게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