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집: 하나님의 소원과 우리의 소원 1967년 12월 3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88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최고의 목적

오늘날 제아무리 독실한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사탄은 그를 참소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 걸리기만 하면 '너는 내 것이다'하며 빼앗아 갈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전인류가 이러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당신이 그렇게 고대하시고 원하셨던 참된 남자 한 사람을 아직까지 찾아 세우지 못하셨고, 또한 한사람의 참된 여성을 아직까지 찾아 세우지 못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6천년 역사(歷史)를 무엇을 위해서 역사(役事)하신 것이냐? 물론 외적으로는 개인과 민족과 종족을 구하기 위하여 섭리역사를 전개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전개하여 나온 것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접적인 관계에 있는 개인이요, 종족이요, 민족이요, 국가와 세계인 것이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개인과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참다운 개인, 참다운 가정, 참다운 종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반드시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또 이 땅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이 땅 위에는 아직까지 참다운 개인, 참다운 남자, 참다운 여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참다운 개인이 나타나지 않고는 참다운 세계 인류 조상과 뿌리가 이 땅에 내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 족속을 중심삼은 이스라엘 민족이 제아무리 성별된 민족이라고 자처한다 하더라도, 그 민족은 하나님의 직계 민족이 아닌 양자밖에 되지 못하는 민족인 것입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똑같은 아들인데도, 하나는 아들로 취급하고 다른 하나는 아들 취급을 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있는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을 바라볼 때 이들은 양자의 자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양자란 어떠한 존재냐? 양자는 혈통이 다른 존재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양자의 입장에서 부르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눈치를 봐야 되고 그 양자도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양자는 내정적(內情的)으로 끓어올라 뼛골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어떤 외적인 사연으로 통할 수 있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은 아버지와 친아들과의 관계와 같이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 구원을 받았다 하며 저나라에 간 사람이라 하더라도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낙원으로 들어 갔을 뿐입니다. 낙원이라는 곳은 양자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자된 족속들을 직계의 족속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어떻게 세우느냐?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인간을 양자의 모습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간을 양자의 모습으로 접하게 되어, 하나님은 그 양자의 혈통을 끊어 버리고 다시금 직계 자식의 모습을 접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구원섭리 기간이 6천년이나 걸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구원섭리하시는 목적은 직계로 세울 수 있는 참된 아들 하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양자가 아닌 참된 직계 아들 하나를 이 땅위에 찾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최고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 아들은 야곱도 아니요, 아브라함도, 모세도, 세례 요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 아들 자리에 서게 되었던고? 4천년 섭리역사에 있어서 종말적인 결실체로 나타났던 분이 누구였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첫 직계 아들로서 태어난 예수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