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집: 추수의 주인 1969년 12월 1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53 Search Speeches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고

이러한 여러분의 탕감 앞에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아들딸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버리지 않고 그 자리에 두고도 탕감할 수 있는 제2전법이 있기 때문에 선생님보다 행복한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이렇게 해와가 결실을 맺어 죄의 뿌리가 결정된 것은 가인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벨을 치는 자리에 서면 망하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나가서 전도한 아들딸이 아벨을 잘 섬길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아벨 앞에 경배할 수 있고 아벨이 시집 장가갈 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만복을 축원할 수 있는 아들딸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이 정성을 들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까지 자기가 낳은 아들딸을 사랑한 것이 전부 다 걸리게 됩니다. 이것이 비법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가인을 사랑해야 되겠어요, 아벨을 사랑해야 되겠어요? 누구를 사랑해야 되겠어요? 남자들도 들어요. 누구를 사랑해야 되겠어요? 아벨이냐, 가인이냐? 「가인입니다」 가인을 자기 아들보다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서 가인을 억울한 자리에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심정을 갖고 가인을 먼저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까지 반대하던 원수들을 내 아들딸 이상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새로이 입적하느냐 못 하느냐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제 가정으로 입적하는 거예요. 통일교회도 이제 축복을 끝내야 됩니다.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지어 완전히 탕감했다는 기준에서야 합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일 않고 살아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축복가정들, 그것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습니다」 하겠다는 사람 손들어 봐요. 내려요.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할 때에 여기에서 비로소 수확의 결실, 수확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역사상에 가정으로 타락하여 심어진 그 열매가 한의 역사를 밟고 올라서서 주인의 자격을 갖추어 가지고 천륜 앞에, 천지 앞에 참다운 부모로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종족의 메시아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종족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씨면 김씨의 씨족 앞에 메시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에 왔다 간 숱한 선조들은 조상이 아닙니다. 그러한 조상들은 여러분에게 수천 만대의 손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가 개벽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할아버지가 손자가 되니 천지개벽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머니가 딸이 되고 딸이 어머니가 됩니다. 거꾸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역사 시대에 천지개벽의 개문이 다른 데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일교회 원리의 관문을 통해서만이 벌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자, 이것이 신나는 일이예요, 신나지 않는 일이예요? 「신나는 일입니다」 `야! 이런 문제가 벌어지는구나' 해야 합니다.

그리고 `네가 역사적인 장본인이구나! 너를 만나기 위해 6천년 동안 기도했다. 6천년 동안 찾고 찾아서 만났으니 흠뻑 있는 정성을 다 들여 주마'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무엇을 위해? 인류를 위하여, 땀은 무엇을 위해? 땅을 위하여, 피는 무엇을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뿌려야 합니다. 누구를 상대로? 가인을 상대로 하여 그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해결지어 놓는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수확의 결실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필생의 사명으로 알고 추구하던 천적인 가치의 모든 내용을 무조건 상속받을 수 있는 승리의 왕자 왕녀가 될 것입니다.

자, 말로는 간단하게 할 수 있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원수의 쇠고랑이 앞을 가로막고 원수의 총칼이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교차로에 부딪칠 것입니다. 그러한 장면들을 대할 때에 여러분은 예수가 기도하던 것을 생각하십시오. 바로 여러분에게 형님이요, 오빠가 될 수 있는 예수도 그러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형님이 간 그 절개를 내가 지키고 가겠습니다. 오빠가 간 그 절개를 내가 지키고 가겠습니다' 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교차로에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소망의 천국을 나를 통하여 이루시옵소서. 오늘 나는 개인으로서 죽어가지만 이로 말미암아 세계 앞에 열매 맺으시옵소서. 내가 바라는 가정 앞에서 나는 희생되었지만 그 가정을 통해서 세계 앞에 열매 맺으시옵소서. 나는 종족의 추모의 대상으로 죽어가지마는 세계적인 추모의 결과를 가져 오게 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세계를 넘을 수 있는 동기의 기원을 갖고 결과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죽어갔기 때문에 동기와 결과가 일치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준에서 심어진 참씨는 참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명실공히 예수님을 중심삼은 결과의 세계를 창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동기를 십자가에서, 죽음의 교차로에서 뿌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입장에서 죽음을 중심삼고 뿌렸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