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집: 본부의 사명과 그 책임 1971년 11월 2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34 Search Speeches

눈물로 지탱해 온 하나님의 섭리-사

여러분, 이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초상집 주인입니다. 왜 초상집 주인인지 보라구요. 복귀섭리를 볼 때에, 하나님이 아담 가정에서부터 아벨 가정,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이삭, 야곱, 모세, 예수, 지금 통일교회 시대의 문선생에 이르기까지 언제 기뻐하고 춤추고 해보았어요? 그래 봤어요? 그래 봤어요? 언제든지 초상집이 아니냐 이겁니다. 번번이, 섭리권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이 이겨 왔어요. 져 왔어요? 져 왔지만 이겨 왔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번번이 져 왔다구요, 져 오긴 져 왔지만 하나님이란 절대자의 입장에서 볼 때 지지 않고 이겨 나왔다는 입장을 세워야 된다는 거라구요.

그러면 무엇으로 그것을 지탱시킬 것이냐? 여러분, 그걸 생각해 봤어요? 싸움으로? 아니라구요. 눈물로 지탱해 왔습니다. 나라가 망한 국민이 됐지만 그 국민이 국가 주권을 지탱시킬 수 있는 동기는 어디에 남아 있느냐? 나라를 추모하면서 눈물로써 얼크러져 가지고 손에 손을 붙드는 거기에서 제2의 건국의 기원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물을 흘리는 초상집의 주인과 같은 하나님이 다시 결심해 나오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눈물과 더불어 결심해 가지고 더 높을 수 있는 신념을 가지고 나서는 사람이 있게 될 때 거기서는 망했지만 망하지 않고 이길 수 있다고 하는 조건을 남겨 나오는 것이 복귀섭리의 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 눈물로 지탱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비참으로 지탱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칠 수 있으면 쳐 보아라! 그 채찍이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아버지를 사랑하는 맹세의 눈물이 결속되는 것이다. 죽음의 교차로가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거기에서 하늘의 충효의 도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찬스가 생기는 것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망하는 것 같지만 흥하는 인연을 이어 나오면서 역사시대에 있어서 이겨 나오는 하늘의 섭리의 뜻이 남아졌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실수했을 때 아브라함의 뜻을 받들어 이것을 이어받은 이삭이면 이삭, 야곱이면 야곱이 아브라함이 실수하던 이상의 자리까지 가더라도 눈물을 머금고 이 뜻을 성취하겠다는 결의의 심정을 가지게 될 때 거기서부터 역사는 지탱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큰 섭리의 뜻을 이어 받은 사람들은 누구더냐 하면 보다 고생한 사람들입니다. 보다 고생한 사람은 무엇을 남겼느냐? 보다 많은 눈물을 남겼습니다. 무엇 때문에? 자기 때문이 아니라 공적인 뜻을 위하여...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노아시대에 노아를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셨지만, 그 하나님 앞에 있어서 하나님 이상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에게 새로운 섭리의 바톤을 이어줘 가지고 노아가 하지 못한 일을 고차적인 입장에서 계승시켜 또다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하더라도 사탄이 참소 못 한다는 거예요. '이 사람은 정성에서부터 노아보다 나은 사람이다. 나은 사람을 내가 사랑하는데 네가 참소할 수 있느냐? 이렇게 하면 사탄도 꼼짝못해요.

그러니 모세보다도 나은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재림역사에서는 예수보다도 나은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가 흘리지 못한 눈물을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예수가 당하지 못하던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를 믿고 안심하소서'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지고 낙망하시는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든가,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슬퍼하는 이상 더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밖에 없더라 이겁니다.

낙심하는 하나님을 대하여 다 쓰러지고 없더라도 '하나님이시여.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며 당당한 기백과 여력을 갖고 하나님을 위안해 드리는 방법과, 그 다음 슬픈 자리에 당도하여 우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더 슬프게 울게 될 때 하나님이 나를 도리어 위로해 줄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섭리의 길은 연결되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