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집: 발걸음을 멈추고 지키시는 자를 다시 바라보자 1959년 03월 0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54 Search Speeches

하늘의 심정을 찾아나서" 용사가 되려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예수를 버리시고도 세상을 버리지 못하셨는고.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도 원수들을 버리지 못하신 것은 무슨 연고였던고. 예수가 죽어가는 이상의 슬픔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타락한 우리들은 이러한 무한한 천정을 찾아 우리를 지켜 주시고 섭리하신 역사적인 심정을 체휼하여, 하나님 앞에 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바라보게 될 때, 이 세상은 기쁨의 세상이 아닙니다. 또 인류역사는 슬픔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기쁨으로 출발한 역사가 못되고 슬픔으로 시작된 역사였던 연고로 오늘날 인류의 역사는 슬픔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어떠한 개인이 자기의 슬픔을 붙들고 울부짖는 것을 보면 여러분들은 동정할 줄 알았지요. 그러나 개인의 슬픔을 동정하고 충고한 자신을 놓고 즐겨하지 마십시오. 개인을 넘어서 가정, 더 나아가서는 국가, 세계, 하늘의 슬픔까지 우리와 연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흔히 개인의 불만이나 혹은 자기 개인의 불행, 자기 개인의 어려움, 자신의 심중에 사무친 슬픔을 갖고 통곡하여 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인의 슬픔보다도 더 큰 슬픔이 가정에 남아 있고, 사회에 남아있고, 국가, 세계, 하늘 땅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늘의 심정을 찾아나서는 용사가 되려면 우리 마음의 슬픔을 느끼되 궁극적인 슬픔까지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행로에서 내가 배척을 받고 배반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몰림을 받고 하는 것이, 천정을 찾아나가는 데 있어서 그것들이 최후의 것들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 끼리끼리 맺혀진 슬픔 이상의 슬픔이 있습니다. 창조주가 크고 높으시다면 그 창조주의 이념이 크고 높고 그의 선이 크고 높은 것은 당연한데, 그 선과 이념을 그리시는 그 마음 앞에 슬픔이 크고 높은 것은 당연한데, 우주적인 선을 대신하여 무한한 대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천정을 찾아나가는 데 있어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되 자기를 중심삼고 출발하여 자기를 중심삼고 결과를 맺기 위해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자는 자기를 붙들고 망해 버릴 것입니다. 가정을 붙들고 그러는 사람은 가정을 붙들고 망할 것이요, 국가를 붙들고 그러는 사람은 국가와 더불어 망할 것입니다. 세계를 붙들고 그러는 사람은 세계와 더불어 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까? 천정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하나님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타락한 인간인 연고로, 슬픈 역사노정을 편답하여 골고다 산정을 향하여 걸어나가야 하는 인간인 연고로 오늘 여러분이 느끼는 고통, 여러분이 당하는 그 슬픔이 끝이 아닙니다. 끝이 아니예요.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원수를 대하여 기도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슬픔의 고개가 있다 할지라도 그 슬픔의 고개를 넘어서 천적인 아들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을 느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죽음의 고개를 밟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 그러한 마음의 충격으로 십자가상에서 원수를 용서하실 수 있었고 죽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종교의 걸음은 무엇을 찾아가는 걸음이냐? 하나님은 종교를 세워, 좋고 귀한 것을 인간 앞에 소개해 주셨지마는 인간은 좋고 귀한 걸음을 걷지 못하고 어렵고 슬픈 걸음을 걸어야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