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집: 역사적인 비운의 고개를 우리는 넘자 1958년 01월 1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88 Search Speeches

비운을 당하신 예수님의 자세

하나님으로부터 소망의 동산을 약속받고 환희의 영광을 돌리면서 바로궁중을 박차고 나서던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심정을 망각하고 나서게 될 때, 그 기쁨은 간 데 없고 원수를 향한 적개심이 변하여 민족을 향한 적개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늘은 그들을 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신도들이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역사를 농락하고 우리의 갈길을 농락하는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워야 되겠다는 마음, 사탄을 향한 적개심을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세력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자기편끼리의 원망이나 적개심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나 교단이 있다면 틀림없이 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민족이 이런 자리에 설까 염려하면서 기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민족과 세계를 지도해야 할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는 때가 되고 환경이 허락하면 민족의 수많은 원수들을 일시에 전멸시킬 것입니다.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하고 자신을 중심삼고 움직여 나가는 사람이 많은 민족은 망하지만, 민족의 원수를 대해 싸워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몸 마음을 희생하는 사람이 많은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에 처하여 있는 여러분 자신들은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가. 여러분이 모든 선조들을 대신하여 나섰다 할진대는,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을 거쳐 야곱과 모세, 예수님 등 모든 선조들이 원수들과 싸우며 걸어간 그 길을 걸어가야 하고, 고생하며 사명을 감당하여 왔던 것을 여러분이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시간 그런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여러분을 앞질러 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모세도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하늘 앞에 호소하던 엘리야의 외로움을 느끼며 싸워 나갔지만 이스라엘민족을 위하는 마음, 그리고 민족의 원수를 갚게 되는 한날을 고대하던 간절한 심정이 그의 마음 몸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쓰러지고 또 쓰러질지라도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사명을 계속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산 것은 자기 일신을 위하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뜻을 위한 삶이었고 민족을 위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시기 6개월 전에 태어나 뜻을 위해 싸워나오던 세례 요한도 그가 뜻을 대해 나타나게 될 때 그의 생활환경은 비참했던 것입니다. 그도 비운의 환경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000년 동안 예고해 왔던 메시아 한분을 위해 광야에서 30여년 동안 준비했던 그의 생애야말로 어느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생활이었습니다. 오직 그만이 아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이런 심정을 품고 30여년간 피어린 슬픔의 생활을 거쳤지만 예수님이 자기보다 더 내적인 비운에 사무쳐 있는 스승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마태나 요한도 역시 비운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4000년 역사를 대표하고 천상의 비운이나 지상의 비운이나 온 인류의 비운을 대신하여 역사상 어느누구도 느끼지 못하던 최고의 비참한 심정을 느끼면서 이 비운의 역사가 있게 한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한 존재가 이땅에 나타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존재를 하늘이 내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짊어지고 오신 분이 누구냐 하면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4000년 복귀역사 가운데 어느누구도 느끼지 못했던 최고의 비참한 심정을 느끼시면서 이 비운의 역사가 있게 했던 사탄과 대결하여 승리하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 자신은 요셉가정에서 30년의 사생애 기간 동안 말할 수 없는 비운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은 민족을 품기 위함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해서 나타내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을 대신해서 교단과 종족까지 품기 위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