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집: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우려는 하나님의 수고 1959년 10월 1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99 Search Speeches

예수의 형편

예수는 태어나서 이 땅 위의 고난의 길을 다 거쳐야 됩니다. 최악의 고난의 길까지도 죽지 않고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굿간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이 땅 위에 아무리 불쌍하고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역사이래 마굿간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섭리는 최하의 자리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하의 자리에서 태어난 예수는 자랄 때도 사랑받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의 30여년의 생애에는 무한한 슬픔이 사무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요셉 가정에 태어났지만 요셉에게는 의붓자식이란 말입니다, 의붓자식. 요셉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의붓자식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 딸을 기르게 될 때, 예수를 등한시했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의붓자식으로 자란 예수였습니다. 동생들한테도 천대를 받고 자란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정적으로도 의지할 부모가 없었고 가정적으로도 안식할 수 없었던 예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늘의 직접적인 지도 밑에서 자랐습니다. 또 심정적으로는 미래의 소망의 심정을 갖고 있는 예수였던 연고로, 그러한 환경에서도 민족과 국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운명에 처한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자리를 원망할래야 원망할 수 없었던 것은 무슨 연고인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고 모시는 아버지는 4천년 동안 이런 억울한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알고, 불효의 역사를 거듭해 나온 선조의 잘못까지도 대신 책임지고 탕감복귀해야할 사명을 지닌 자신을 것을 알았기에, 그는 반대하는 무리를 대하여 원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대등한 심정을 가지고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도 반대하는 민족을 축복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를 죽으러 오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과만 바라보니 간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의 예수, 죽기 전 예수의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죽는 예수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어떠한 사람을 사랑합니까?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을 사랑합니까, 몰라주는 사람을 사랑합니까?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은 어떠하겠느냐(눅 12:49-50)''고 누구한테 말씀하셨습니까?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의 상대가 없었던 예수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4복음서의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의 상대를 찾지 못한 예수였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천당가고, 주님을 신랑으로 모신다고? 천만 부당하다는 사실, 말씀은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심정과 실체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슬픔을 내적으로 주고받아 가지고 이 슬픔을 위로해 준 예수 앞에, 그의 사랑하는 아들 딸 된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땅 위에 나타났는데, 그 예수 앞에 독생자 될 수 있는 아들 딸은 어디 갔는고, 생각해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