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집: 아버지와 함께 1970년 04월 1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70 Search Speeches

안타까우신 아버지-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우리는 그런 입장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입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고, 자신이 위태로운 운명길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시점에 서 있는 자신을 자랑하고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부양받아야 할 우리는 `당신의 사랑을 저에게 베풀어 주시옵소서'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사실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라는 말이나 서로의 인연을 따지는 그런 말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버지와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할 관계요, 아버지께서 내 아들이라고 하면서 직접 대해 주실 수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천만사의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이요, 그 누구도 벗어 날 수 없는 슬픔의 구렁텅이가 엇갈려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 자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직관해 볼 때, 어머니도 만날 수 있고 아버지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갖고 있는 우리인데도 불구하고, 경각에 달린 자기의 운명을 중심삼고 손도 내밀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입장에 서야 하는가? 만일에 역사적인 죽음의 인연을 갖고 나온 그 모든 구렁텅이를 다 메우지 않으면 나를 구할 수 없는 입장에 선 아버지이신 것을 느낀다면, 나를 위하여 간곡한 마음을 가지신 아버지, 자기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갖는 시급한 마음보다 몇배나 더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 나를 구하고 싶어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여러분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서 와서 구해 달라고 하겠지만, 생각이 깊은 사람은 염려하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도리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타락한 후손일망정 아버지께서 구원의 손길을 펼래야 펼 수 없는 딱한 사정을 이해하고, 부디 자신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시라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었느냐? 죽어가는 아들딸을 보면서도 손도 벌리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부모가 있다면,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다 그 부모의 딱한 사정을 모르고 그 부모를 대해 반박하고 욕할 것이며, 부모가 아니라고 결단을 내리고 결국에는 이별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들이 해 왔던 습관이 아니겠습니까? 복귀의 행로에는 그러한 일이 많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될 무렵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러한 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후로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할 때,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그 입장이 어떠하겠느냐? 또, 하나님이 그런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렇게 죽음의 길을 가는 아들의 마음보다도 그 아들의 손을 펴서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천만 배나 더 강렬하게 솟구치는 것이 어버이의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동정하고 싶지만 동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연의 구렁텅이가 남아 있고, 심정의 골짜기가 엇갈려 있는 것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 아들을 죽음길로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 것이냐! 죽음을 당하는 아들보다도 몇천 배 더 딱한 입장에 설 것이 아니겠어요?

통일교회를 믿고 따른다고 하는 무리 가운데에서도 그런 입장에 부딪치게 되면 번번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따라온 길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그 자리가 어디냐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아버지의 딸이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내 자신이 언제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진정한 인연을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타락한 나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갈 수 있는 인연을 되찾아야 됩니다. 그 인연을 되찾아가는 길은 슬픔의 길도 아니요, 고통의 길도 아닙니다. 그리고 낙망이라든가 절망이라든가 비애라든가 역사의 모든 환멸을 느끼지 않는 길입니다.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의 요건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고 내가 천애의 고아의 신세에 처하게 된 것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하려는 악의 세력 때문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