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집: 완전한 탕감 -0001년 11월 30일, Page #210 Search Speeches

탕감의 자리

또, 내가 이 뜻길을 나서 가지고 제일 수난을 당한 것은 언제였느냐? 제2차, 둘째번 길이었습니다. 물론 첫째번 길도 그랬지만 둘째번 길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섭리의 배후를 더듬어 볼 때 하나님은 땅과 인연될 수 있는, 심정적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체를 끊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나 자신을 망하게 하려는 섭리냐? 아닙니다. 이것은 완전한 승리의 기점을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내가 알았습니다. 타락한 혈통을 받고 태어난 역사적인 섭리를 두고 볼 때에도, 이것은 불가피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 사탄이 그 조상들을 통해서, 가정을 통해서, 형제들을 통해서, 자신을 통해서 들어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청산지을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하늘편을 대신해서 나설 수 있는 배후를 갖지 않고는 탕감의 자리에 못 나갑니다. 그 당사자는 알든지 모르든지간에 탕감의 인연은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뜻을 알고 있는 우리들이 이것을 슬픔으로 맞이하지 않고 어떻게 감사함으로 맞이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슬픔으로 맞이하는 것은 열번 천번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충분한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정이면 가정에 있어서 절망된 사연이나 그 누구 앞에 체면을 세울 수 없는 사연이라도 슬픔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와 같은 입장을 통해서 결속되고 하나의 공고한 터전이 되시옵소서' 하고 소망 가운데 이것을 맞지 않고는 뜻을 발전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 그 자체에게는 절망이 되지만, 제물을 드리는 그 자리는 소망이 출발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 자리는 절망이 연결되는 자리인 동시에 소망이 출발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이면 통일교회 교인이니 여러분이 제물의 입장에 서게 된다면, 한 면은 절망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요 또 한 면은 소망적인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양면을 어떻게 넘어서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넘겨 주는 것도 아니요, 사탄이 넘겨 주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넘어서야 되느냐? 자기 자신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끊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완전히 사탄을 끊고 나서게 되면, 그것은 사탄세계로 보면 절망인 것입니다. 완전히 절망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립됨으로 말미암아 하늘세계는 완전한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출발은 한꺼번에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길은 개인으로부터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의 길이 열렸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길이 열렸다고 해서 그 누구를 믿고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자주적인 입장에서 개척해야 합니다. 또한 여기에는 시간을 투입해야 되고 노력과 정성을 투입해야 됩니다. 투입하는 시간과 정성도 보통 사람의 몇 배 이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에게 성장기간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시간을 투입하고 노력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성장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사탄이 다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찾아와 가지고는 `네가 책임을 졌으면 너의 선조보다 나아야 된다' 고 하며 들이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될 때 그것을 절망의 요건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절망적인 입장에 섰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절망적인 환경에서 새로운 나, 새로운 자아, 새로운 이념을 찾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는 개인, 가정, 국가, 세계가 개재되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