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집: 아버님의 슬픔 1972년 08월 06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5 Search Speeches

불효로 인한 아버지의 슬""을 해소시킬 수 있" 길을 모색하라

그러면 종교는 무엇이냐? 그러한 하나님, 심정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지금까지 수천년 수만년의 역사를 거쳐 나오면서 우리 인간 자체를 구하기 위해서 그 아픔을 억제해 나오신 비참한 과거를 연상하면 연상할수록, 과거에 지내 나오던 수난길이 멀면 멀수록,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그 내정에는 자식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되살아났을 것이 아니냐. 자식을 위하는 그 마음이 되살아 났을 것이 아니냐. 자식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되살아났을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타락한 역사 종말시대에 메시아를 이 땅을 회복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 존재로 세워 가지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 기쁨은 어떻겠느냐? 그 기쁨이라는 것이 옛날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의 슬픔을 능가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타락했을 때 이상 자극적인 기쁨을 통쾌하게 느낄 수 있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나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불쌍한 하나님으로 끝날 것이 아니냐. 그가 자랑할 수 있는 심정적인 내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시대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당한 수난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위해서 수난길을 극복해 나오는 데 있어서의 그 모든 슬픔과 역경의 갈림길이라는 것은 심정에 상처를 가해 준 것은 물론이고, 가해진 상처가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입니다. 이 상처를 품고 찾으시는 것이 뭐냐?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수난길의 고통에 비례되는, 찾아지는 때의 기쁨의 자극을 배가할 수 있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성경에도 주인이 백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을 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데 찾아 다닐 때는 고통이 심했지만 그 한 마리 양을 찾았을 때는 놔 둔 아흔 아홉 마리를 보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이겁니다.

심정세계에 있어서는 가중된 역사시대의 수난길이라는 것이 물론 비통하고 비참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간이 찾아질 수 있는 때에 있어서는 도리어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이상의 슬픈 심정을 넘어설 수 있는 자극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해 가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참고 극복해 나오는 또 다른 일면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길은 뭐냐? 그러한 심정적인 내연을 어떻게 내가 상기시키느냐 하는 데에서부터 본질적인 신앙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간 회복운동 혹은 구원운동, 복귀운동에 있어서 어디서부터 사람이 돌아설 수 있느냐?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구요. 슬픈 하나님의 심정 앞에 있어서 그것을 동정하고 내가 거기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모가 가는 길에 자식이 같이 가면 그는 효자인 것입니다. 군왕이 가는 데 같이 끝까지 생사지경을 넘어서 가려고 하는 사람은 충신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임을 알아 가지고, '부모가 고생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나도 고생하는 자리에 간다. 그분이 나로 말미암아 슬픔을 당했기 때문에 내가 더 슬픔을 당하는 것이 응당한 것이다' 하며 그것을 감수할 수 있는 입장에 설 때 그는 효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신앙자는 세상의 고통과 마주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을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너희 부모나 처자나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못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고, 그 다음엔 '자기를 이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나에게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된다구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이 심정의 빛을 짊어지고 있으니 이것을 갚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효한 자는 불효로 인한 그 심정의 요인을 해소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라구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가 극도로 고통스러웠던 것은 세계적인 십자가를 대신한 심정의 중심으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심정의 가지와 같은 여러분들에게도 거기에 접붙이기 위한 또 하나의 십자가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