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집: 하늘이 주관하는 세계 1972년 07월 3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00 Search Speeches

하나님의 이상인 사'의 실체가 나타나면

이렇게 볼 때, 절대자인 하나님이 완전히 기쁠 수 있는 자리에서 상대적인 인간을 대해,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 인간이 둘도 없는 상대자라면 그 상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었느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런 원칙을 두고 볼 때 사랑받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타락이라는 것은 탈락을 말합니다. 이것은 미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더냐. 정상적인 기준에서 어떤 이상적인 완성을 이룬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결여된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완전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아이구! 사랑하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작가가 구상한 것은 100퍼센트 완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바라는 그것이 90 퍼센트밖에 안되었다 할 때, 거기에는 10 퍼센트의 미련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더해야만 완성한 기준에서 '아이고 기쁘다'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내 행복이 극할 수 있는, 만족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0 퍼센트 완성을 했다면 90 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랑을 할 수 있지만 100 퍼센트의 사랑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99 퍼센트까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엔 100 퍼센트 사랑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냐?

최고의 자리, 인간 완성을 중심삼은 그 자리에서, 완전한 주체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하는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느냐? 주체로서 그러한 사람을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타락을 공인하는 그런 세계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셨지만, 그런 소원을 이룰 수 없는 환경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100이 되기를 바라는데 90이 되었다 할 때는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이런 생각 했을 겁니다. '나는 시험을 치게 되면 틀림없이 100점 맞는다. 맹세코 100점 맞는다. 맹세코 100점 맞는다. 이것이 나의 이상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100점을 못 맞았다, 99점, 혹은 99.999점을 맞았다, 그렇게 되면 그걸 자랑할 수 있어요? 100점과 같은 레벨이지만 손을 들고 자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대자면 절대자일수록 그것은 절대적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이 상대이상을 가지고 우리 인간을 대해서 그야말로 좋아서, 만면에 희색을 띠고, 자기 자신을 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 자리야말로, 이 길이야말로 나의 행복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그것이 이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것이다. 기분 좋다'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이 있었느냐?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사랑해 보실 수 있었느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본연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왔겠느냐? 우리의 눈을 바라보게 될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이 그 심정으로 최고의 절정을 다해서 표시한 그 도수, 극의 자리를 넘어설 수 있는 미의 상징체로서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겠느냐? 그럴 게 아니예요?

그러면 자기의 내심의 기억이 살체로 나타난 그 모습, 자기의 내정의 모든 그리움이 자극적인 미모로 나타날 수 있는 그 모습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찬양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한 가지 가지고도 자기 사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요, 자기 기쁨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물건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기념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손수건 하나라도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면 눈을 볼 때, 이는 내 전체의 창조이념을 걸고 맹세하면서 사랑의 마음을 표시하고, 기쁨의 표시를 해도 끝이 없을 것이 아니냐? 그럴 것이 아니예요? 코를 보나 귀를 보나 얼굴을 보나, 뒤를 보나 앞을 보나, 전신의 어떠한 부분을 보더라도, 손끝 하나까지도 그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 아니냐?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찬양할 수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랑권내에 품겨 가지고, 그 사랑에 동화되어 가지고 '사랑이 어떻더냐? 할 때, '이렇게 행복한 것이다'라고 증거할 수 있는 실체대상으로서 사지백체는 나타날 것이 아니냐?

그런 자리에 선 인간에게 불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손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면 그 기쁨을 내가 느낄 수 있으니 이 손은 아름다운 손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내 일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게 될 때,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몸은 하나님이 완전히 취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백퍼센트의 합격품으로 등장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자극하는 요소로서 지금도 자극하는 것이요, 영원히 자극시킬 수 있는 소망적인 지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어떻겠느냐? 그런 자기 자신을 보고 얼마나 만족하겠느냐? 그럴 수 있다구요. 여러분. 안 그래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아내는 그 얼굴을 보고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얼굴이지' 하는 것을 느끼면, 그 얼굴에 대한 존귀성과 그 미모에 대한 가치성은 배가되는 것과 마찬가지 입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이상인 사랑의 실체가 이 우주 창조 이후에 나타났다면 그 얼마나 이상적이겠느냐? 오늘날 인간이 쓴 시편이나 아가서에서 사랑을 찬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기쁨의 심정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이 시편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아가서와 같은 사랑의 기록을 남겼으면 그 얼마나 멋졌겠어요? 그것이 인간에 있어서 사랑의 표준이 되고, 사랑이 움직이는 정서생활의 전통이 되고 역사가 되었으면, 오늘날의 인간이 불행할 수 있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