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집: 기도와 생명 1970년 06월 07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08 Search Speeches

영원한 생명의 발판이 되" 것

이 땅 위에 왔다가 운명의 순간을 맞이하는 최후의 자리에서 과거를 뉘우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과거의 모든 사실들이 영상으로 지나갈 것입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생명체를 가지고 지금까지 인연된 환경과 남겨 놓은 사연 등, 지난날의 모든 것이 일생의 최후의 순간에 자기의 마음에 영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참이 있었다, 내 생명보다도 귀한 그 무엇을 남겼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비록 이 땅에 왔다가 가더라도 보람있는 한때를 남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왔다 가는 이 인생 행로가 행인과 같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모든 과거의 사연을 회상해 볼 때, 그 모든 사연이 머리를 흔들며 회상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졌으면 그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회상할수록 자기 얼굴에 환희가 넘치며 자기의 모든 문제가 이상에 잠길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도 그에게는 위로의 한 장면으로 장식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과거를 회상하는 순간이 공포의 순간이 아니고 다른 그 무엇을 남겼다면 그의 과거도 죽지 않은 것이요, 현실도 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과거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민족이 따라올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이요, 세계 만민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인연을 남긴 사람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떠한 사연일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어떠한 민족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비참하고 비정한 때가 있을 때 그 문제를 자기가 책임지고 해결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거기에 부딪친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의 과거지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한때일 것입니다. 생애노정에서 자기를 위해 죽음의 자리까지 가는 것보다 형제면 형제, 친족이면 친족, 남이면 남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서 그들을 구했다면, 그들을 구하기 위해 부딪친 때가 있었다면 그러한 사실들이 최후의 운명의 자리에서 그의 마음 선상에 영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중심삼은 행복한 때가 있었고, 수많은 군중으로부터 환영받고 자기가 영광스럽게 찬양받는 거룩한 때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순간에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하였느냐, 참되었느냐,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참과 선은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남에게서 결과를 맺게 하든가, 남에 의해서 시작되어 나에게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야만 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리에서 천지의 모든 존재는 주고 받는 인연을 거쳐야 된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생활이 주는 생활이었으면 죽음길에도 공포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었고 남을 위해 희생했으며, 참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눈물도 남으로 말미암아 흘렸고, 내 생명도 남으로 말미암아 투입했고, 내 소원도 남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내 맥박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생명력을 끌어모아 남을 위해서 투입했다고 할진대는 그 과거는 빛날 수 있는 과거일 것입니다.

그런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민족을 생각하게 될 때, 소망의 민족은 이런 민족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그가 그런 과거를 그리워하게 될 때, 남을 위해 희생하며 소망하는 본연의 선은 이래야 된다는 결정을 지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내가 그것을 위하여 싸워 온 과거가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럴 수 있는 미래가 있어야 된다'는 내용을 지니고 하나님 앞에 간다고 할 때, 그 내용은 자기의 영원한 생명의 발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성현이 가는 길과 범인(凡人)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성현은 역사와 더불어 살려고 했고, 세계와 더불어 살려고 했고, 미래와 더불어 살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범인은 자기로 말미암아 살려고 했고, 세계도 자기로 말미암아 있게 하려던 사람입니다. 범인은 과거를 생각하면 흑암이지만, 성인은 과거를 생각하면 광명입니다. 그 광명은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망의 민족을 그려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의 천국이 있다면 그 천국은 그들로 말미암아 출발을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여러분은 험상스런 환경을 갖춘 이 타락권내에서 여러분 자신이 가는 모습을 도표로 그려 보게 될 때, 1년은 이렇게 가고 1년은 저렇게 갈 것이다, 혹은 10년은 이렇게 가고 10년은 저렇게 갈 것이다 하며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일생 행로를 계획하면서 높고 낮음을 예측할 것입니다. 그 높고 낮음이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사람은 최후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때, 자기를 위해 살면서 남을 희생시킨 그 모든 것이 자기를 얽어맬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란 자아를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는 생애를 반평생 이상 남겼으면 그것이 자기를 절반 이상 꽁꽁 얽어맬 것입니다. 이러한 생애를 남겼다면 최후의 운명길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자리에 설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생애의 도표가 선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그려져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내려갔다고 하더라도 슬픔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와 같은 인생행로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인륜 도덕도 그런 길을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