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집: 한 많은 하늘땅 1964년 10월 05일, 한국 광주교회 Page #299 Search Speeches

인간의 본성의 '용은 하나님으로 말미"은 것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동으로 움직이고 서로 움직이고 남북 혹은 상하로 움직이는 만유의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 크나큰 목적권 내에 있어서…. 여러분이 세포를 보든가 혹은 혈관을 보더라도, 혈관이 이렇게 가는 놈도 있고 건너가는 놈도 있고 올라가는 놈도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 한 개체권 내를 볼 때는 상반적인 작용을 하고 있지만 전체의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는 한 목적의 방향을 갖추어서 나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용하는 이 모든 현상도 어떤 목적을 위해 벌어진다고 볼 때에 이 대우주가 움직이는 것은 하나의 목적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의 목적의 어떠한 목표를 향하여, 중심과 상대될 수 있는 그 종말점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서 헤아려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개인을 두고 보면 개인도 욕망이 있단 말이예요. 이 욕망은 무엇 때문에? 자기의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이 그러하듯이 가정도 그러하고, 종족도 그러하고, 민족도 그러하고 국가도 그러합니다. 오늘날 역사적인 이런 최후의 급박한 상태를 이룬 이 두 역사적인 사조, 자유와 공산 두 진영이 대비되는 이 흐름도 결국은 하나의 목적세계를 촉구하는 최종 단계의 관문에 부딪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우주는 반드시 하나의 목적을 정해 나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해서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지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작용과 방향을 갖추어 주는 어떠한 힘이, 내재적인 힘이 뒷받침 돼 있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상대적인 이 세계는 역사 변천과 더불어 거기에 부합시켜 나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땅 위에 어떠한 훌륭한 인간이 있어서, 어떠한 위대한 정치가가 있어서 이 세계를 하나로 만들고 싶다고 해서 하나 만들 수 있느냐? 안 된다는 거예요. 어느 일개국의 주권자가 망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어느 한 가정의 주인 중에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자고로 천만인 혹은 역사적으로 왔다 간 수많은 영들을 붙들고 물어 보게 될 때도 망하고 싶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망해 갔다 이겁니다. 어느 누가 '내가 세계적인 책임을 진다'고 태어나면서부터 간판을 붙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럭그럭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게 된다면 인간은 우연한 사정, 혹은 필연적인 사정에 의해 존재하는 것 같지만서도 그것은 대운수의 추이가 어떠한 방향을 갖춰 가지고, 하나의 목적 세계를 다시 만들고자 하는 어떠한 동기의 힘이 배열돼 있기 때문에 그 배열된 힘에 의해서 상대적인 작용체로서 작용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겁니다. 역사적인 목적의 세계가 반드시 와야 되겠는데, 그 목적의 세계가 반드시 와야 될 것이거늘 그 목적의 세계가 온다면 반드시 하나의 중심으로 계신 어떠한 이 대우주의 중심체가 있다면 중심이 둘이 아닌 이상 목적의 세계는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땅 위에서 참이 무엇이냐? 참된 것이 무엇이냐? 동으로 가도 하나요, 서로 가도 하나요, 남으로 가도 하나요, 북으로 가도 하나요, 하늘에 가도 하나입니다. 참이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된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구요. 사람은 많은데 이건 하나밖에 없어요. 그 기준에 있어서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세상에서 귀한 것이라는 것은, 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동시에 하나밖에 없다 이겁니다. 그건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본심을 해부해 보게 될 때, 우리의 본심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오늘 어렵게 살고, 혹은 지게를 지고 구르마를 끌고 처참한 자리에서 하루의 생활을 하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하여 피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돌아올 때에 돈 한푼도 못 받고, 한푼도 벌지 못하고 맨손으로 돌아오는 그런 처량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길가에 쓰러진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동정하고 싶은 것이 인정(人情)이라구요. 내 자체가 동정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지만 불쌍한 사람이 있게 될 때는 동정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종자는 다 마찬가지예요. 또 아무리 불쌍한 사람,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자기가 선한 일을 하고 나서는 '아! 분하다' 그러지 않는다는 겁니다. 선한 일을 하고는 좋아한다구요. 또 선한 일을 하는 데는 끝이 있는 것이냐? '아! 내가 선한 일을 요만큼 했으니 이제 나는 선한 일 하는 데는 졸업했다' 할 수 있는 끝이 있느냐? 끝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한 사람을 위해서 선한 일을 했으면 한 가정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고 싶고, 한 가정을 위해서 했으면 한 종족, 김씨면 김씨 박씨면 박씨 자기 문중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고 싶고, 거기서 선한 일을 했으면 그다음에는 자기 민족이라든가 자기 국가라든가 더 나아가서는 한 나라를 위해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선한 일을 했으면 세계를 위해 하고 싶고, 이 세계를 위해서 선한 일을 했으면 그다음에는 하늘땅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제일 꼭대기에 하늘땅보다 더 큰 것이 있으면 그 더 큰 것을 위해 선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러면 이런 욕망이 왜 나오느냐? 작용이라는 것은 반드시 힘의 기반, 힘의 내용을 갖추지 않으면 그 작용은 벌어지지 않는 겁니다. 우리의 양심적인 욕구와 작용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없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예요. 있는 데서 나온다는 겁니다. 본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돼서 그렇게 됐느냐? 내가 보기에 사람이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며는 미미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본래 이 존재가 지닌 가치가 얼마나 컸었는가 하면, 오늘날 이 지구성이라는 걸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겁니다. 하늘이 제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사람 하나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요, 땅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요, 하늘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이겁니다. 하나님이 존재의 가치성, 오늘 만유세계에서 상대적인 가치성이라도 지니기 위해서는 만물, 혹은 물질, 혹은 어떠한 물건보다도 사람을 중간 매개체로 세워 놓지 않고는 그 가치를 스스로 표시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

사람에게는 희노애락이 있습니다. 기쁘면 좋고, 혹은 행복을 요구하고, 자유를 요구하고, 그다음에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하고, 무한한 세계에 있어서 영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요건들이 다 좋은 요소라는 것은 본래 하늘로부터 인간이 관계를 맺어 가지고 지니고 살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고가 생겨서 차단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인간이 하나의 주체와 하나의 상대적인 관계가 돼 가지고 완전히 주고받으면 일체가 됩니다. 둘이 주고받으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일체가 되는 거예요. 천리가 그렇게 돼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주체요, 나는 상대이지만 둘이 주고받아서,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만 되면 좌가 우로 돌아가고 우가 좌로 바뀔 수도 있는 겁니다. 내가 너요, 네가 나라는 거예요. 하나님도 홀로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세워 가지고 하나님은 마음과 같은 존재요, 사람은 몸과 같은 존재가 돼 가지고 둘이 하나로 존재하면서 무엇을 느끼겠느냐? 둘이 있음으로 해서 자극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했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때에 오늘날 사람의 본성의 모든 작용이라는 것은 나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그렇게 하느냐?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역사가 변천해도 선을 추구하려는 그 마음과 혹은 좋은 것을 좋아하는 마음, 더 큰 것과 자기가 관계를 맺겠다는 마음, 더 나아가서는 이 세계를 전부 다 내가 내 손아귀에 넣고 흔들어 보겠다는 마음을 다 갖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마음이 어디서 나오느냐? 본래의 사람이 그렇다는 겁니다, 본래가. 어느 누가 갖다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기를 본래 그렇게 태어난 거라구요.